어머니는 곧바로 경로당으로 옮긴다고 짐을 쌌고 병수는 붙잡지 않고 되레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경로당은 홀로된 노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군에서 기름을, 마을 회비에서 쌀을 대주고 있었다. 아무리 고집이 센 어머니라도 이삼 일 정도 지나면 들어올 줄 알았는데 벌써 이 주일이 지났다.“어이, 병수 이 사람. 오늘도 비닐하우스 붙잡고 있을 줄 알았더니 돼지 잡는구먼.”
상현과 병수가 엉거주춤 서 있는 사이 석진이 양손으로 바지를 잡아 올리고 다가왔다.
“대목에 조개나 팔지 뭐하러 오남.”
“조개들두 명절 쇠야 통통해지죠.”
기석이 비꼬는 투로 말했고, 석진이 능청스럽게 받아넘겨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석진은 구두에 묻은 진흙을 털다 상현이 서 있는 쪽에 시선을 멈췄다.
“이게 누구여. 상현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두 누구 찬가 했는디 이렇게 귀한 분 차였구먼.”
석진은 바지 같은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 손을 놓고 성큼성큼 걸어가 상현의 손을 잡았다. 상현은 선배인 석진의 행동이 멋쩍은지 설핏 웃었다.
“잘 있었지?”
“예. 형님도 잘 계시죠?”
“그럼. 나는 잘 있어. 그런디 큰일 허너라구 고생 많치?”
“그렇죠. 뭐.”
“읍내에서도 자네 칭찬이 자자 혀.”
상현과 석진은 말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모닥불 주위로 갔고, 종만이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며 입을 열었다.
“테레비로 보니 자랑스럽더구먼.”
“아, 예. 형님.”
“참, 그런디 농가 부채탕감은 어떻게 되는 겨?”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부채 탕감이란 없습니다.”
순간 종만의 얼굴이 굳어지고 모닥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상현에게 쏠렸다.
“정부에서는 탕감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려 경감입니다. 이자를 대폭 낮추고 장기상환으로 돌리는 것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상현은 공식적인 정책을 발표하는 정부 관료의 모습으로 바꾸어 말했다. 병수는 사무적인 상현의 태도에 당황이 되었고, 동창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돼지우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정부에서 돈을 다 값아 줄 수야 없지. 정부 입장두 생각해야지.”
석진이 모닥불 위로 양손을 내밀며 맞지, 하는 표정으로 상현을 바라보았다.
“넌 자식아, 농자금으루 여자장사해서 돈 벌었으니까 그딴소리 하지.”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기석이 화를 벌컥 냈다.
“아저씨 무슨 소리유. 분명히 나두 비닐하우스 쳤슈. 텃밭에…. 모르는 겨?”
석진이 펄쩍 뛰면서 사람들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이보게 상현이 우리두 그 정도루 알구는 있는디, 어느 정도 선이냐가 문제지?”
종만은 그런 와중에도 간절한 눈빛으로 끝까지 대답을 들을 태세였다.
“이 사람아, 얘가 개인적인 사람인감…. 결정두 안된 정부 비밀을 함부로 얘기하게.”
상현의 어머니가 종만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어색해진 종만은 모자챙을 만지며 병수 쪽을 바라보았다. 병수는 못들은 척 돼지우리 앞에 깔린 비닐을 평평하게 폈다.
“비밀은 무슨 비밀이여? 자네도 알것지만 농민 죽인 건 정부여. 그것두 순진헌 놈만 죽였어.”
기석이 석진을 노려보며 말했고, 석진은 못들은 척 담배 불을 붙이면서 옆으로 피했다.
“참, 아저씨두 틀렸네유. 얘가 농촌 잘못되라구 책상에 앉어서 일허것슈.”
상현의 어머니가 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기석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아저씨, 이해합니다.”
상현이 상현의 어머니 손을 다정스럽게 잡고 기석에게 허리를 굽혔다.
“말인즉 그렇다는 겨. 자네두 똑바루 알어야 혀.”
기석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돼지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돼지는 동요 없이 주둥이로 땅을 파고 있었다. 원래는 잡아먹으려고 키운 돼지가 아니었다. 새끼만 낳아줬더라면 큰살림은 보태지 못하더라도 비료 값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미를 세 번이나 시켰는데 새끼가 들어서지 않았다.
“아저씨가 까유.”
병수는 갑자기 돼지 잡는 법을 잃어버린 듯 아득해져, 기석에게 도끼를 내밀며 눈을 돌렸다. 하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는 상현의 눈과 마주쳐 불에 데인 것처럼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니가 혀.”
기석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뒷걸음질까지 쳤다.
“까기만 허유. 째는 건 지가 허께유.”
병수는 할 수 없이 협상안을 내밀었다.
“헛, 참 이 사람. 이제 나는 이선으루 물러날 때가 됐는디.”
기석은 싫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도끼를 받아들고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갔다. 돼지는 땅을 파던 주둥이를 들고 우리를 한바퀴 돌며 기석을 피했다.
“구정물 좀 가져와.”
“어이, 구정물.”
병수가 집 안에 대고 소리쳤다. 아내가 구정물 한 바가지를 들고 와 내려놓았다. 돼지는 곧바로 바가지에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죽을 줄도 모르고 주둥이를 들이대는 돼지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고함치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기운이 심장 쪽으로 모아졌다. 생식능력이 없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병수 자신도 돼지와 똑같은 신세였다.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숨을 끊어줄 걸 후회하는 사이에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돼지는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무릎을 꺾더니 사지를 파르르 떨었다. 병수는 돼지의 눈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기석이 들고 있는 도끼를 받아 한쪽 구석에 치워놓았다.
눈만은 맑고 투명했던 아이는 한 달 만에 죽었다. 병수는 아이를 화장해 뒷산에 뿌리고 곧바로 보건소로 달려갔다. 수술대에 올라서기 전 의사에게 묶는 게 아니라 잘라 달라고, 잘라서 불로 지지면 영원히 복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사무적으로 자녀가 몇이냐고 물었고, 병수는 셋이나 된다고 말했다. 며칠이 지나 수술자국이 아물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마치 수술 전에 만들어진 정액 속에 더러운 병균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병수는 화장실에 웅크리고 앉아 마지막 한 방울이 나올 때까지 자위행위를 한 다음에야 아내 곁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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