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콘서트와 발레. 어느 쪽 관객이 더 많을까. 놀랍게도 조용필이 아니다.국내 가장 큰 무대 중의 하나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올해 유료 관객 동원에서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12월 18~25일)이 14회 공연에 회당 평균 1,727명으로 1위를 차지해 10회 공연에 평균 1,662명을 기록한 조용필콘서트(12월 1~10일)를 눌렀다.
둘 다 송년 프로그램이었다. 3위도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6월 1~6일)다. 내년으로 창단 40주년을 맞는 국립발레단 역사상 2001년은 최고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발레의 르네상스
최근 3, 4년 새 발레 붐은 가히 폭발적이다.
발레 학원마다 어린이들이 넘치고, 관객 반응은 대단히 뜨겁다. 모스크바ㆍ파리 등지에서 잇달아 날아든 우리 무용수의 국제 콩쿠르 입상 소식은 발레 열기에 더욱 불을 당겼다.
국립발레단주역 이원국 김지영 김주원은 연예인 못지 않게 팬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스타다. 국립발레단 열혈지기를 자처하는 동호회 ‘정익는 발레 마을’ 회원은 1,300명이 넘는다.
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심지어 한국인이 발레를 하는건 코미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만큼 공연이나 관객 수준이 한참 뒤떨어진 것이 현실이었다.
외국에서는 “한국에서도 발레를 하느냐”고 묻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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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짧은 시간에 발레가 인기를 끈 요인은 스타의 등장이 가장 크다. 구소련 붕괴이후 러시아 발레학교 등 외국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무용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발레 선진국의 외국인 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무용수 기량이 크게 올라갔다.
국내 양대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이 펼치고 있는 선의의 경쟁도 도약의 지렛대가 되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러시아 마린스키극장의 예술감독 출신 올레그 비노그라도프의 지도 아래 외국에 견줘도 손색없을 실력을 다져가며 탄탄하게 성장 중이다.
국립발레단은 볼쇼이극장 예술감독을 지낸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3부작 ‘호두까기인형’ ‘백조의호수’ ‘스파르타쿠스’를 레퍼토리로 확보해 비로소 세계에 내놓을 만한 작품을 갖췄다.
▽발레의 약진 계속될까
그러나 최근 한국 발레의 이처럼 놀라운 약진이 앞으로도 계속 가능할 것인가는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발레 발전의 토대가 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발레학교가 없다는 점이다. 예원학교(중학교)와 예술고등학교, 각 대학에 발레 전공이 있지만, 외국의 발레단 산하 발레학교에서처럼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외국 발레학교는 보통 10~18세까지 다니고 졸업하면 바로 발레단에 들어가 활동한다. 무대에서 은퇴하면 발레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침으로써 경험을 전하고 전통을 잇는다.
은퇴한 뒤 돌아갈 곳이 있음은 안심하고 춤 출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거기 비해 국내 발레 무용수들은 90% 이상 대학을 마치고 무대에 선다.
학벌을 중시하는 풍토 때문에 무용수로서 가장 잘 뛸 수 있는 중요한 시기를 놓치는 것이다.
무대에서 은퇴하면, 학벌ㆍ파벌로 얽힌 학교의 좁은 문을 뚫고 자리잡지 않는 한 먹고 살 길도 막막하다.
남자 무용수들은 결혼하고 나면 대부분 딴 길을 찾는다. 80년대 주목받는 남자 무용수였던 모씨는 지금 세탁소 주인이 됐다.
남자 무용수의 병역 문제도 큰 걸림돌이다. 군 복무 동안 몸이 굳어버려 무대에 복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요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병역 특례로 군 면제가 되지만, 그럴 기회가 주어지는 콩쿠르는 세 개뿐이다.
그나마 국제 콩쿠르 입상은 국내 콩쿠르보다 훨씬 어려운데도, 전혀 인정되지 않고 있다.
반면 음악 쪽의 병역 특례가 인정되는 콩쿠르는 국내외 수십개에 달해 형평에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장기적 문제 말고 국립발레단에 당장 닥친 고민은 스타의 퇴장이다.
국립발레단의 인기는 간판스타 이원국 김지영 김주원의 힘이 가장 컸다. 그런데 김지영은 해외진출을 위해 연말 ‘호두까기 인형’을 끝으로 국립발레단을 떠나고, 국내 최고의 발레리노 이원국은 무용수로서는 내리막인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이들 세 스타를 능가할 후보는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전망이다. 국립발레단은 이제 스타의 인기 대신 전체적인 앙상블로 승부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악조건 속에서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 발레가 참된 르네상스를 맞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발레 붐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낙관하기 힘든 현실이 무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이임하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호두까기 인형’ 공연이 막을 내린 25일 밤, 최태지(42)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은 인사하러 나온 무대에서 끝내 눈물을 흘렸다.
지난 6년간 국립발레단을 이끌며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떠나는 그에게 관객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정든 단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그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예술감독으로서 그는 남다른 추진력과 정열로 많은 일을 했다.
국제콩쿠르 파견ㆍ해외공연을 통한 한국 발레 알리기, 찾아가는 공연과 해설 무대를 통한 발레 대중화, 유리 그리가로비치 3부작을 비롯한 레퍼토리 확대 등이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모든 것이 단원과 스태프, 주변의 도움 덕분입니다. 그동안 참 힘들었는데, 우리의 무대를 기다리고 박수쳐 준 관객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그저 고마울 뿐이지요. 이제 쉴 수 있다 생각하니 홀가분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일에 치여 잊고 지냈던 제 자신을 찾아야죠. 컴퓨터도 배우고 영화도 보고 제대로 못했던 엄마와 아내 노릇도 하면서…”
그는 단원들과 연습실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반면 마음놓고 춤만출 수 있도록 단원들의 복지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국립발레단은 아직도 네모 반듯한 연습실, 단원들이 쉴 곳, 전속마사지사가 없다.
“이제는 관객의 입장에서 박수를 많이 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당부는 이렇다.
“국립발레단에 변함없는 애정을 보내주세요.”
그의 자리는 내년부터 김긍수 중앙대 교수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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