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여성 최고경영자(CEO) 칼리 피오리나 휴렛 팩커드(HP) 회장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세계에서가장 영향력있는 비즈니스 우먼‘ ‘실리콘 밸리의 여제(女帝)’ ‘여성계의 잭 웰치’등 늘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그녀지만, 이젠 ‘CEO생명’까지 도전받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됐다.피오리나의 시련은 그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HP와 컴팩간 합병이 현재 두 회사 대주주 가문의 반발로 무산될처지에 놓인데 따른 것이다. 250억달러가 넘는 이 ‘수퍼빅딜’이 무산된다면, 피오리나는 더 이상 HP의 CEO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란게 일반적 관측이다.
HP는 휴렛 가문과 팩커드 가문이 공동창업한 회사로 두 가문은 지금도 HP의 대주주다. 이중 휴렛가문의 대주주인월터 휴렛은 13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서한에서 “주주들은 합병안에 불만을 갖고 있으며 주총에 상정될 경우 거부될 가능성이 높다”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팩커드 가문도 합병반대를 결의한 상태다. 양 가문의 보유지분은 18%에 달하고 있으며,합병을 무산시키기 위해 기관투자가들을 상대로 반대표 결집에 나서고 있다.
휴렛과 팩커드 가문의 합병반대 이유는 득보다 실이 크다는 점. HP와 컴팩은 상호 중복부문이 많아 시너지 효과가적은데다, 합병후엔 저가 PC시장에 노출돼 주력인 프린터사업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만큼 HP는 지금처럼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게 대주주들의 판단이다.
하지만 대주주들의 반발 배경엔 ‘피오리나식경영’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거부감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HP의 기업문화는 미국기업으론 보기 드물게 가족적이고 인간적이며 검소하고 노사간 상호신뢰가 매우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황에도 좀처럼 해고 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피오리나식 경영은 보다 현대적이고 변화지향적이다. 화려하고 사교적이며 고급지향적인 그녀의 스타일은 처음으로 HP의 전통과 문화적 충돌 소지를 안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피오리나는 지난 여름 7,000여명의 감원계획을 발표, 대주주와 종업원들을 놀라게했다. 팩커드 가문의 데이빗 팩커드는 “컴팩과 합병할 경우 1만5,000여명에 달하는 중복인력이 생긴다. 이들을 해고하는 합병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주주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피오리나는 합병강행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 그녀는 최근 인터뷰에서 “(대주주들처럼) 현상유지가 전략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현상유지가 컴퓨터 시장의 전략이 됐던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피오리나는 현 이사진의 전폭적 지지를 바탕으로, 내년 주총에서 합병안 통과를 위해 찬성표 결집에 박차를가하고 있다. 합병은 이제 대주주와 경영진간 정면충돌 국면으로 치닫고 잇다.
피오리나는 지난 해 컨설팅회사인 PWC와 합병시도에서도 한차례 고배를 마신 바 있어 컴팩과 합병마저 무산된다면 CEO에서 퇴출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하지만 대주주와 싸움에서 역전승을 거둬 ‘빅 딜’을 관철시킨다면 1998년이래 4년 연속 선정돼 온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비즈니스 우먼’(포천지 선정) 타이틀을 무난히 5연패할 것으로 보인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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