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저녁 식사를 하러 시내를 나가는데 3시간 반이 걸렸다.세시간 반이면 내가 사는 분당에서 강릉의 바닷가까지 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밥 한끼 먹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갈등이 생겨났지만 버스에 꼼짝 못하고 앉아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되돌아가기도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거리마다 사람이란 사람은 다 쏟아져 나온 듯 분주했다.
망년회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저 거리 뒤쪽에 숨은 붉밝힌 집에는 어린 아이들과 엄마만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나로 말하자면 집에 남아 있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다.
다른 사람들이 망년회의 시끄러운 분위기에서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말들을 하고 있는 걸 상상하며 집에서 아껴둔 술을 야금야금 마시는 게 좋다.
연말을 맞아 TV에서 보여주는 좋은 다큐멘터리를 공짜로 보는 즐거움도 아는 사람은 아마 알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실 사회 생활하는데 지장을 받기도 하지만나는 이 호젓함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내가 올해는 특별한 망년회에 갔다.
대학 동창 두 명이 10년 만에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동네 레스토랑에서 망년회를 맞자는 말을 한 것이었다.
전업주부인 그녀들이 남편에게 나도 망년회에 간다고 큰소리쳤다는 전화를 받으며 나는 꼭 나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일년 만에 만난 친구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작은 선물을 주며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아무리 여자친구들 사이였지만 쑥스러울 만도 했는데 친구는 그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정말로 해야 할 일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모든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녀가 한달 전 젊은 올케를 병으로 잃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순간 팔뚝으로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젊은 올케는 죽기 전에 그 고통 속에서 식구들 하나하나를 불러 미안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렇게 병들기 전에는 그녀는 표현에 아주 인색한 여자였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죽으면서 말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왜 좀 더 아이와 남편을 안아주고 더 많이 미안하다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말을.
9ㆍ11테러 사건이 났을 때 미국의 무역쎈터 빌딩이나 납치되어 무기로 사용된 민간 여객기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족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한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어쩌면 인간이 가장 진실해지는 마지막 순간 그들이 했던 공통적인 말은 "살려달라"거나 "무섭다"가 아니라 바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로 인해서 나는 이 끔직한 전쟁과 학살의 시대에 세상이 어쩌면 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움과 폭력이 강해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더 소중한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그만큼 강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인간은 유한한 제 목숨보다 더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을.
그 끔찍한 순간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무력한 '사랑한다' 는 말을 필사적으로 전함으로서 그들은 인간은 단지 폭력에 희생되는 가련한 존재임을 부정한 것이었고, 인간은 쇳덩어리와 함께 부서져 내리는 물질 이상임을 증명해준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인간은 싸우고 복수하고 누군가를 응징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 순간 악으로 기울었던 이 세상은 비로소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직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안아주며, 말할 수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이런 망년회라면 해마다 가고 싶다. 연말만이라도 한해가 끝나는 그 즈음만이라도 나로 하여금 사랑한다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전하게 해주는 그런 망년회말이다.
공지영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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