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법원이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를 상대로 주주 대표소송을 낸 시민단체의 손을 들어준 것은 재벌 기업의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와 ‘거수기식’ 이사회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의지로 풀이된다.이번 판결은 앞서 서울고법이 1998년 제일은행의 소액주주들이 한보그룹에 대한 부실대출 책임과 관련, 은행의 구 경영진을 상대로 낸 최초의 주주대표소송에서 전액 승소 판결을 내린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당시 법원은 한보특혜 비리로 형사처벌된 전직 임원 4명에게 400억원이라는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 삼성전자 이사진배상 판결은 삼성전자가 국내 기업을 대표하는 ‘블루칩’ 기업군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퇴출위기에 몰린 제일은행 이사진을 상대로 한 판결이 도덕적 단죄의 의미가 컸다면, 이번 판결은 건실한 기업의 이사진이라도 재벌 오너의 입장만 대변해 회사에 손해를 입혔을 경우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크다.
실제로 재판부는 이날 이사 9명에게 900억원이라는 거액의 배상판결과 함께 이례적으로 가집행 판결까지 내렸다.
이번 판결을 내린 김창석 부장판사는 선고 직후 “재벌의 부당 내부거래는 공정 경쟁을 막아 자본주의 발전의 암적 존재였다”며 “내부거래 관행으로 그룹 전체에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계열사 이사들은 주주들의 권익을 위해 계열사의 이익만 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노태우씨에게 전한 비자금 부분을 제외하고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책임에서 모두 제외됐다.
소송을 맡은 김석연(金石淵) 변호사는 “지난 98년 상법의 개정으로 재벌총수가 이사회에 가지 않아도 책임을 지을 수 있게 됐으나 증거가 없어 책임을 묻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재계 "경영 위축…소송 남발"우려
법원이 삼성전자 전ㆍ현직이사들에게 내린 배상판결에 대해 재계는 ‘경영활동의 위축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며 우려하는 입장을 보였다.
아울러 유사소송의 남발로 인한 경영혼란 및 신속한 의사결정의 지연 가능성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분위기다.
재계의 한 고위인사는 “경영상 의사결정은 항상 리스크를 수반하는 것”이라며 “경영활동에 책임은 져야겠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금전적 배상이 수반된다면 누가 이런 리스크를 안으려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번소송의 대상 중 상당 부분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전에 발생한 것들로 당시는 지배구조란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라며 “아무런 권한이 없던 전문경영인들에게 거액의 배상책임을 지우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다.
재계는 특히 모든 재벌총수들이 검찰조사까지 받았던 6공 시절 정치자금 제공과 관련, 이건희(李健熙) 삼성회장에게 배상판결이 내려짐에 따라 다른 대기업에도 관련소송이 잇따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나아가 내년부터 집단소송제가 도입될 경우 남소(濫訴)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당사자인 삼성그룹과 삼성전자는 법원판결에 대해선 공식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법원판결은 존중하지만 결과적으로 경영활동에 상당한 제약과 위축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배상판결을 받은 삼성전자의 전ㆍ현직임원들은 개별적으로 항소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현재 1,000억원 규모의 임원배상 책임보험에 가입한 상태지만, 보험의 소급적용일이 1998년4월로 되어 있어 이번 판결대상사건을 모두 보험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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