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자민련 마포당사 총재실에서 김종필(金鍾泌) 총재를 만났다. JP는 다변(多辯)이었고 표현도 전과 달리 매우 직설적이었다. 목소리도 시종 높았다. 배석한 정진석(鄭鎭碩) 대변인이 분위기를 누르러뜨리기 위해 여러 차례 거들어야 했다.JP 언설(言說)의 트레이드 마크인 은유적이고 수사적인 간접화법은 찾기 힘들었다.마침 이날은 JP의 아성인 충북에서 480명의 자민련 인사가 한나라당에 대거 입당하는 날 이었다. JP는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않는 게 우리의 정서”라고 말했다.
JP는 “소이부답(笑而不答 ㆍ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함)으로 일관했더니 손해를 많이 보았다”면서“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말했듯이 인간은 어려운 줄 뻔히 알면서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로 내년 정국에 임하는 심경을설명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여러번 (JP를) 인터뷰 했는데 많이 달라지셨다”고 했더니 JP는“은유니 뭐니 하며 여유를 찾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대담= 이병규 정치부장
_국회상황 등 정치가 계속 어지러운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나한테 묻지 말고양 당(민주당과 한나라당) 지도자들한테 국가관이 뭐고 정치관이 뭔지 물어봐요. 모두 거기서 기인합니다. 입으로는공생 운운하면서 그걸 파괴하고, 법 을 지켜야 한다면서 하나도 안 지킵니다.
모두가 욕심을 부리고 있어요. 이 같은 결함을 지닌 정신 구조니 맨날 싸움만 하지요. 정치인들이 할 일은 않고 말꼬리나 잡는 유치한 일도 벌어지고 있어요. 나도 화가 나서 그런 적이 있는데 잘못됐다고 반성하고있어요 (배석한 정진석 대변인은 JP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 대해 ‘죽음의 사자 같다’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만성적인 정치불안을 고치려면 제왕적인 대통령 중심제를 내각제로 바꾸는 길 밖에 없어요.”
_건강보험을 둘러싼 혼돈이 컸습니다. 이번에도 열쇠는 자민련이 쥐었던 게 아닙니까.
(언성을 높이며)“우리가 무슨 힘있다고 그래요. 정부는 예정대로 통합을하겠다고 하고 한나라당은 분리하라고 하고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비난하고있어요. 세 군데가 다 틀린데 국민은 어떻게 하라는 소립니까.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어느 경우에도 원칙을 지킵니다. 그 정도로해둡시다.”
_지난번 검찰총장 탄핵안 파동은 자민련이 사실상 최종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언제 탄핵하자고 그랬습니까. 우린 잘못된 일 있으면 스스로 물러나라고 그랬을 뿐입니다. 검찰이 심기일전하는 전기를 마련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봤고 그걸로 그친 겁니다. 근데 우리더러 변했다, 변심했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회창씨에게 야단을 쳤어요.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나도 기독교 신자이지만 하나님이 듣고 보고 있습니다.”
_항간에 ‘이회창 대세론’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만.
“대세가 그런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1년 남았습니다.기복이 또 있을 겁니다. 근데 모든 부조리는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에서 비롯됩니다. 고쳐야 할 때가 됐는데도 과욕을 부립니다. 난 역대 대통령을측근에서 지켜 본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카네기나 록펠러 같은 부잡니까. 어디서 돈이나 그런 천문학적 자금을 뿌립니까. 부패의 근원이 거기부턴데왜 (대통령제를) 그대로 하자고 그럽니까. (집권) 2년만 되면 집권당은 정권을 연장하려고 돈을 모으는데 온 정신을 쏟아 사회를 어지럽히고 부패시킵니다.
이걸 되풀이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겁니다. 이런 걸 고치려면 내각제밖에 없어요.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십 수명씩나옵디까. 우리나라에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 많습니까. 21세기를 이렇게 출발하면 안됩니다.”
_김 총재가 집권해도 내각제를 하려면 자민련이 소수당이라 국회통과가 어려울 텐데요.
“대통령이 하겠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내각제를 발족시키면그 자리서 물러난다, 그런 각오로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안을) 내놓으면 국민이 찬성할 테고 국회의원이 반대할 도리가 있나요. 개인 욕망 때문에나라 진로를 흐트려선 안됩니다.”
_대선정국의 기복에는 정계개편도 포함되나요.
(손을 내저으며) “난 그런 소리 안 해요. 인기라는 것은 거품과 같아요.언제 어떤 이유로 꺼질지 모릅니다. 거품은 전부도 아니고 기반도 아닙니다. 거품은 거품인 거요. 그런데 인기에 영합하려다 보니 건강보험문제 같은게 생깁니다. 설령 인기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소신 있게 끌고 가는 게 리더십입니다.”
_여론조사를 보면 정치판을 바꿔야 한다는 주문이 절반이 넘는데 앞장서실 의향은 없습니까.
“그래서 내각제를 하자는 겁니다. 이대론 안 됩니다.내가 할 일은 (내각제를) 주장하고설득하고 다니는 겁니다. 결과는 상관 없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그랬는데 난 ‘노정객은 죽지 않는다.
그거(내각제) 이뤄지면 사라질거다’고 말합니다. 내 나이 70 중간을 넘는 노령으로 기승전결의 마지막 단계서 한 번 소신을 밝히고조용히 사라질 기회를 잡자는 겁니다.”
_내각제를 위한 차선책으로 다른 후보를 지원할 수도 있습니까.
“두 번 세 번 속아왔는데…. 정말 이것(대통령 중심제)은 바꿔야 한다는 소신이 분명하고 국민지지가 있다면 난 얼마든지 협력할 겁니다. 다만 그런 사람이 없으니 내가 해야겠다는 거지요.”
_현 대권주자 중에 눈 여겨 본 인물이 있습니까.
(단호하게)“아직 없어요.”
_얼마 전 민주당 이인제 상임고문에 대해 ‘큰 뜻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달리 어떻게 대답합니까. 누구든 ‘좋은 생각 갖고 있을 때 이룩되길 바란다’ 그렇게 말해주는 것 아닙니까. 근데 자꾸 의미 부여를 해요. 물론 이 고문이 내각제를 하겠다면 협력할 겁니다.”
_이회창 총재도 포함됩니까.
(주저 없이) “아 그럼요. 지금으로선 그런 게 안 보이니 아직은 거리를 놓고 보고 있는 중입니다.”
_지난 두 번의 내각제 약속이 모두 깨지는 쓰라린 체험을 하셨는데요.
“허허허…. 이번은 또 속이지 못할 겁니다. 대통령 되는 이가 자꾸 속이면 용서가 되겠습니까.”
_충북지역 도의원 등의 한나라당 입당식이 오늘 있었는데요.
“우리나라엔 5,000년을 이어온 생활철학이 있습니다.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겁니다. 도리 없습니다. 2,000~3,000명 모이고 왔다 갔다 한다고 충청권이 전부 그리 쏠리는 것은아닙니다. 충청도 가서 확인해보세요.”
_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중요 당사자로 세간의 혹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과욕 탓입니다. 과욕에 차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우린 국리민복을 위해 협력했고 호남의 한을 푸는 등 나름의 성과도 있었습니다. 근데 저쪽에서 과욕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과욕이 이렇게 됐습니다.”
_공동정부의 유종지미를 자주 말씀하셨는데 저쪽서 다시 유종지미를 꺼낸다면요.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지 몰라요. 허허허…. 모르겠어요.”
_김대중 대통령이 원하면 만나시겠습니까.
“어떤 이유든 현직 대통령이 정당 책임자에게 얘기 좀 하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정치는) 현실입니다. 하긴 어떤 사람은 현실인 자민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 협량을 갖고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청탁(淸濁)도 같이 마실 도량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회창 총재라면 자민련을 이렇게 취급 안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짓밟으려 하는데 그래 가지고 어떻게 한나라를 책임질수 있겠습니까.”
_이회창 총재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총재께서 자신을 비난하는데 대해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표현을 썼습니다만.
“그건 한 때 내 좌우명이었습니다만. 소이부답 하니까동양적인 정서가 남은 사람은 이해하는데 요새는 바보 취급을 합디다.
그래서 이제는 적당히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정치인생에 소이부답만 하면 우스운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태양이 하루를 끝내고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고 찬연하게 끝내는 광경을 보면서 ‘나도 매듭 단계에서 저렇게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_내년 1월 15일 대선출마를 선언하시는데 후보가 돼서도 골프장을 찾으실 생각입니까.
“난 대통령이 돼도 골프를 칠 겁니다. 건강 유지하는게 그것(골프)뿐입니다. 공무에 지장 없는 시간에 골프를 칩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할 겁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인터뷰 메모
김종필 총재는 인터뷰 내내 내각제 얘기를 했다. 논리의 모든 초점을 내각제에 맞추었다. 각종 게이트는 물론 정치불안의 원인을하나같이 ‘제왕적 대통령제 탓’으로 돌리며 “부패를 근원적으로 고치려면 내각제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내각제는 잘못되면 그 자리서 책임질 정당이 바뀌니 부패도 별로 심화되지 않아요. 여야가 자주 정권을 맡다 보면 국정을 공유하는 점이 커져 지금처럼 극한적으로 싸우고 말꼬리나 잡고 다투는 유치한 일도 줄어듭니다. 북의 위협을 들어 강력한 리더십을 말하는데 그건 개발시대에나 주효했어요….” 끝없이 이어지는 내각제의 당위성이었다.
JP는 “내년에 할 일은 내각제를 주장하고 설득하고 다니는 것”이라며 “내가 나서 싸워보겠다”는 말로 내각제의지를 확인했다.
대선출마 결심도 내각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내 나이 70 중반의 고령이오. 하루종일 만물에 생활력을 공급하던 태양이 하루를 끝내고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고 찬연하게 저무는 광경을 보면서 나도 매듭단계에 저렇게 됐으면 하고 결심한 적이 있어요. 그것이 내각제요. 결과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JP는 내각제를 한다면 어느누구와도 손잡겠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얼마 전 ‘죽음의 사자’라고까지 표현하며 극단적인 반감을 드러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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