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입시열기가 한창이던 1986년 1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입시철이면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신문의 사회면을 심심치 않게 장식하던 때였다.
막 견습기자 생활을 끝내고 사회부 사건기자로 배치 받아 제법 사건의 경중과 의미를 깨칠만한 안목을 키워가던 기자가 평소처럼 강남경찰서 형사계에 들러 간밤의 사건사고를 챙기던 중 한 당직형사가 내 손목을 잡고 구석쪽으로 끌고갔다.
"어이, 윤기자. 이 편지 한번 읽어보지. 교육현실을 고발하는 논문을 한편의 시처럼 써놓았는데…."
형사가 건네준 것은 예쁜 편지지에 또박또박 쓴 한 소녀의 편지였다.
"난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고 남을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음악도 듣지 못하게 하며 친구들이 보낸 편지마저 찢어버렸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 데도 공부만을 요구받는 이 삶에 경멸을 느낀다."
학교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가던 기자는 이것이 유서임을 곧바로 눈치챘다.
즉각 학교 등을 찾아가 취재해본 결과 유서의 주인공인 A양은 며칠 전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소주 4병을 마신 채 신경안정제를 과다복용하고 숨진뒤였다.
A양은 강남 모여중에서 줄곧 1등을 달리다 지난 가을학기에서 2등으로 처지자 어머니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고 외출마저 중단 당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또한 부모님 모두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였고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상류층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건설회사 중견간부로 중동에 나가있는 아버지 대신 가정을 책임진 어머니의 지나친 통제 때문에 그간 여러 차례 모녀간에 충돌이 있었다고 담임선생님은 전했다.
A양의 자살사건은 여느 자살과는 달리 기사가 될만한 요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다음날 이 사건은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에요. 1등 강박 우등생 소녀 자살'이란 타이틀로 사회면 톱으로 기사화됐고 즉각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녀의 충동적 자살을 선정적으로 보도했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병든 교육풍토가 낳은 비극으로 안타깝다"는 견해가 대세였다.
보도가 나간 날 여러 여성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사연을 취재해가더니 그 달 대부분의 여성지들은 이사건을 대서특필했다.
한 르포작가는 이 사건을 소재로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에요"라는 책을 냈고 다음해에는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돼 이른바 '교육현실 고발 학원영화'의 붐을 선도하기도 했다.
어느덧 15년이 지나 이제 당시 A양 또래의 딸을 둔 가장이 된 기자는 딸과 의견충돌이 있을 때마다 그 소녀가 죽음으로 부르짖었던 말을 되새겨 보곤 한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예뻤던 A양이 6통의 유서를 남기면서도 정작 어머니에게는 왜 한 줄의 사연도 남기지 않았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윤승용 워싱턴특파원
syy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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