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좀 이해가 된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는 정말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술을 마시면 늘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져 버렸다. 뭐 이런 여자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알았다. ‘엽기적인 그녀’를 본 그녀는 엽기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대체 엽기란 무엇이란 말이냐. 코미디도 온통 엽기 열풍이었다.
엽기 인형 마시마로, ‘보면 후회한다’는 묘한 캐치프레이즈로 사람을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엽기 사이트 ‘노란 국물’, 엽기 커플 선발대회까지….
이 세상은 엽기와 비엽기족으로 나뉘는 것 같다. 여자들은 전지현도 아니면서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고 술을 먹고 뻗어 버리고….
그러나 아는 이제야 알겠다.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헤어지자고 말하자 이렇게 말했다.
“저희 연변에서는 그저 지하철에서 오바이트 서너 번은 해야 저거이 술 좀 하는 갑다 한다”나?
물론 그녀가 깜찍한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좌우명은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그녀는 정장을 입고도 요즘 유행하는 구두 같은 운동화 스니커즈를 즐겨 신었다.
운동화가 20만 원씩 하는 것도 많다나? 프라다, 구치 같은 명품 메이커에서도 이런 운동화가 있다나? 참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녀는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친구들끼리 계를 들었을 정도다. 그건 그녀의 문제만도 아니다. 중학생인 조카도 명품 휴대폰줄을 사야 한다고 친구들끼리 계를 하고 있으니. 대체 명품이 뭐길래.
내가 몇 마디 듣기 싫은 소리를하자 그녀는 내게 이런 e메일을 보내왔다.
“뭬야! 으이 재섭서…냉무” 재섭서(재수 없어)? 어디 경찰서 이름인가? 냉무(내용무)? 냉면을 먹자는 얘기? 대체 무슨 얘기지?
e메일이나 문자메시지 해독서라도 한 권 있어야 할까 보다. (20세 꽃미남)
천만의 말씀! 내가 엽기녀를 따라 한다고? 나는 소싯적부터 온 몸으로 엽기를 실천해 왔을 뿐. 사실 나의 취향은 좀 독특하다.
그간 만난 남자들의 황당한 패션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던가. 허리선이 명치까지 올라오는 핫바지라니! 그런데 드디어 나는 만났다. 내가 원하는 ‘꽃미남’을.
“과거는 용서해도 못 생긴 것은 용서 못한다”는 게 남자들만의 생각인 줄 아나? 여자들도 마찬가지야.
차태현 원빈 UN처럼 부드럽고, 예쁜 남자가 요즘 나의 이상형. 하지만 그와 만남을 지속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그야말로 건실한 대학생. 아마 그는 대학졸업 후 전문직을 가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원하는 ‘보보스(부르주아+보헤미안)’의 삶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소득을 누리면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갖는 사람. 쉽게 말하면 에르메스 자켓을 입고, 동대문에서 산 멋진 가방을 들 줄 아는 안목. 뭐 그런 거겠지.
손님이 적은 청담동 퓨전레스토랑을 찾아가 ‘청담족’이 되어보는 것도 내 꿈의 하나다.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라고? 물론 기성세대가 보기엔 내가 좀 얼이 빠져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떻게 하랴. 나는 라이프 스타일로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데. (20세엽기녀)
일단 부럽다. 그대 20대들은 인생의 ‘알맹이’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로 고민을 하니 말이야.
올 한 해 나의 고민은 좀 더 구체적이다. 이단 다이어트는 나를 옥죄는 단어다. 삼겹살을 먹을 때 나는 제니칼을 함께 복용한다. 그래도 몸무게는 별로 줄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조깅’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친구들은 이영자처럼 지방흡입술이라도 받아 보라고 한다. 내친 김에 성형수술도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하지만 문제는 돈이다.
IMF 이후 30대 여성의 취업이 증가하고, 2030 카드니, 25~35 통신 서비스니 우리 세대를 겨냥한 상품이 줄을 잇고 있는데 정작 내 수중에는 돈이 없다.
아이 영어유치원을 보내기에도 남편 월급으로는 빠듯하다. 친구가 계를 탔다며 빌려 주겠다고 한다.
돈이 생기면 갚으라나. “친구 아이가” “미안해서” “친구끼린 미안한 거 없다” “됐다” 나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 때 나도 ‘미모는 나의 힘’이라고 힘주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미모는 돈의 힘’이 된 게 사실이다.
십자수나 놓으며 인터넷으로 배운 발마사지나 해보아야 겠다. 저녁에는 ‘개그 콘서트’를 보고 ‘왕건’을 봐야 겠다. TV나 보고 살 뺄궁리나 하고, 한심하다고?
그러나 과연 IMF 이후 우리나라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벌써 시작된 대선 경쟁에서 누가 승리할지, 대체 빈 라덴이 왜 테러를 저질렀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잡고는 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혼자 하나? 남편은 매일 늦고, 인터넷 여성 사이트에서도 쇼핑과 미용, 섹스 얘기뿐인데. (35세 아줌마)
년말이면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사실 난 조금 우울하다. 나와 동갑인 해리 포터는 세상을 쥐고 흔들고 있는데.
하지만 나는 어른들처럼 유행에 민감하지는 않다. 내가 킥보드를 사달라고 조르자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너무 유행에 따라 살면 안 된다.” 그러나 유행을 좇는 것은 어른들이다.
송년회에 다녀온 아버지는 “브리지드 바르도를 성토하며 개고기에 요즘 유행하는 드라큘라주와 쌍끌이주를 마셨다”고 자랑도 아닌 자랑을 하셨고, 엄마는 다이어트에 열심이다.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던 엄마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이라면 채널을 바꾸며 열심히 본다.
선생님들도 그렇다. ‘그 여자네 집’에서 김남주 파마가 유행하자 김남주와 전혀 공통점이 없는 선생님들까지 그런 머리를 하고 나타나셨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서는 모르는 말이 참 많이 나온다. 예쁜 황수정 누나와 관련해 이야기되는 ‘최음제’라는 것은 뭘까?
하리수 누나가 실은 남자였다는데, 그게 뭐 ‘트랜스젠더’라고 했지. 아무튼 올해는 유난히 많은 누나들이 TV 속에서 울었다. 이태란, 이영자, 황수정….
어른들은 ‘조폭 영화’가 아이들 정서를 망가뜨린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도 가릴 것은 가려서 이해한다.
내가 보기에 나의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잘은 모르지만 정치인들 같다. 소리만 지르고 변명과 거짓말만하고 돈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나저나 유행이란 무엇일까. 사전에는 ‘의복 화장 사상 등의 양식이 일시적으로 널리 퍼지는 현상(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이라고 나와있다.
내 생각에 유행이란 처음 하는 사람은 이유가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따라 하기’만 있는 것, 그래서 그 안에 빠져 있으면 대단해 보이지만 한 발만 비껴 서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나이답지 않게 유식한 나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을 믿는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 모든 유행도 다 흘러가는 것!! 네? 애늙은이 같다고요? 그럼, 이것도 ‘유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그럼 내년에 다시 뵙죠. *_* (11세 애늙은이)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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