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명의 인명피해를 내고서야, 데 라 루아 대통령은 사임을 결정했다.비상조치 선포로도 소요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대통령궁 앞의 오월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경제실정의 원흉인 카발로 장관의 목으로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던가. 메넴 행정부 시절도입했던 태환법이 사태의 시발이었다.
1페소를 1달러로 묶고, 정부가 태환을 법으로 보증하는 이 제도는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큰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수출경쟁력은 급전직하했고, 소비자들은 고평가된 페소화를 쓰는 재미에 마취되었다.
이 시절 팔아치운 공기업의 민영화 수입도 적당히 나눠 썼다. 메넴의 개혁정치 10년은 '눈물의 계곡'을 지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빛나는 봄나들이 같았다.
마취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자 성장의 잠재력은 거의 소진되었고, 1994년의 멕시코 위기, 1998년의 브라질 위기와 같은 인플루엔자에도 쉽게 감염되었다.
성장은 정체를 거듭했고, 실업율도 16-18%에 달했다.
사임한 데 라 루아가 집권했을 당시, 신정부에 남은 카드는 거의 없었다. 태환법체제를 폐기하고, 대안적인 경제정책을 설계하기에는 집권연정 세력의 힘이 부쳤다.
시장을 흔드는 내외금융 세력, 야당인 페론당의 견제구로 인해 신정부는 손쉽게 기존의 정책 틀에 안주했다.
급기야 태환법체제의 디자이너 도밍고 카발로를 재입각시킨 대통령을 보고, 국민들은 배신감마저 느꼈다.
내외 금융권이 지지하는 장관을 통해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겠다는 전략이었지만, 이는 국민 다수의감정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었다.
장관은 태환법체제를 고수한 채 재정적자를 제로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이미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에다, 실업률도 20%나 되었다.
단기외채를 장기로 바꾸는 대량의 공채 스왑을 실행했고, 제로 적자를 위해 공무원 임금을 13% 삭감했지만, 시장은 안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10개월간 200억 달러의 돈이 빠져나갔다. 급기야 장관은 90일간 예금인출을 부분적으로 동결한다는 포고를 발했다.
예금주의 주당 인출한도는 250페소, 해외여행자는 일 회당 1,000페소만 가져가야 한다.
여유자금으로 만기가 돌아온 외채의 상환의무를 계속 완수하겠다고 했지만, IMF는 장관의 노력을 외면하고, 이전 협정에서 약속한 12월 전도자금 13억 달러의 이관을 거부했다.
어처구니없는 유혈사태로 이끈 또 다른 하나의 조치가 있었다. 장관이 탈세를 막기 위해 모든 거래에 신용카드나 수표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다.
모든 거래를 '은행화'하겠다는 장관의 과욕은 준비가 전혀 없는 졸속 조치였다.
전국에 있는 90만개의 영업장소에 카드 거래 기계가 있는 곳은 14%에 불과했다. 900달러나 드는 카드기계 설치에 영세업자들은 분노했다.
임금을 13%나 깎인 공무원, 연금생활자, 20%에 달하는 실업자들, 가계주인들 모두 정부가 내건 '거래의 은행화'에 분노를 폭발시켰다.
신용카드 사용자의 매월 납입금은 5달러, 수표사용자는 20달러, 현금자동인출기 월3회 사용은 3.50달러.
은행은 가만히 앉아서도 떼돈을 벌게되었다. 노조는 말할 것도 없고, 보수적인 중간층도, 상인층도 전국적인 소요사태에 가담했고, 정권은 광범한 민중소요와 유혈사태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2월 22일 과도정부 대통령 사아는 외채의 지불유예를 선언했다. 태환법체제를 유지한다고 했지만,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평가절하도, 채무의 페소화도 조만간 실행될 것이다. 이미 기업인을 포함한 국민 다수가 태환법체제가 모든 불행의 근원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IMF와 미국 조야가 극찬했고, 동구권에도 수출하고자 했던 카발로의 아이디어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과격했던 신자유주의 개혁이 남긴 폐허의 한 장면이다.
/이성형 세종연구소 초빙연구원 중남미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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