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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문·이과 '장벽부터 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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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문·이과 '장벽부터 부수자

입력
2001.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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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이른바 구조조정의 희생물이 된 분들에게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나 역시 30여년 전 구조조정의 제물이 된 경험을 갖고 있다.당시 서울대 진학을 상당부분 독식하던 한다하는 서울의 세 명문고등학교들은 서로 어쭙잖은 숫자경쟁을 하고 있었다.

어느 학교가 서울대학에 몇명의 학생을 합격시켰는가가 주요 일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도 이세 학교들 중 하나에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학교에 새교장선생님이 부임해 오시면서 '구조조정'이 단행되었다.

경쟁하고 있던 다른 두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과가 약하다는 판단과 함께 문과반을 줄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12개 반들 중 넷이었던 문과반이 셋으로 줄었다. 그 과정에서 누가 봐도 문과 영순위였던 내가 이과로 축출 당하고 말았다.

나는 중학교 2학년 시절 예년에 비해 특별히 성대하게 치러졌던 그해 교내백일장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덕에 학교 안에서 이미 시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나를 이과반으로 배정한 것은 누가 봐도 부당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다. 나는 곧바로 교장실로 쳐들어가 부당함을 성토하며 당장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서울대 350고지'라는 구호에 몽둥이까지 350개를 특별주문하여 비치해 두셨던 교장선생님이 한낱 문학지망생 따위의 인권에 눈 하나 깜짝하실 리 만무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했던가. 중학교 때부터 함께 몰려다녔던 친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과로 배정받은 마당이라 나의 시위는 이내 힘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어느 날 나는 과학자가 된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과학자가 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정반대다.

첫걸음은 밀려서 떼어놓았지만 생명에 대한 나의 끊임없는 추구가 결국 과학 속에 있었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닫곤 행복한 과학자가 되었다.

1979년 미국유학을 준비하며 작성했던 내 자기소개서에 이런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려서 생명을 시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러다 한 때는 생명을 모습을 깎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의 본질을 파헤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생물학자가 되었다.

생명의 기원과 의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생물학에 몸담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겁없이 글도 여기저기 뿌리며 산다.

특별히 많이 쓸 때는 일주일에 원고지 200매를 쉽게 메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절대로 넘을 수 없어 보이던 문과-이과의 벽을 은근슬쩍 넘나들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쏘다니던 산과 들을 여전히 쏘다니고 있고 그 어느 문인 부럽지 않게 글도 쓰고 산다.

그런데 요사이 어찌된 영문인지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날로 높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공계를 지망하는 학생 수는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수능의 수학II와 과학II는 상대적으로 공부하기도 힘들고 열심히 해도 점수가 잘나오지 않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이과에서 문과로 옮겨가고 있다.

금년도 입시에서는 자연계를 지원하는 수험생 수가 전체의 27%밖에 되지 않아 인문계지원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예체능계보다 겨우 10% 정도 많은 인력으로 과학강국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형편이다.

15개 반가운데 이과반이 5개밖에 안되는 고등학교가 적지 않다니 그 옛날내가 겪었던 구조조정을 거꾸로 당하고 있을 후배들이 적지 않을듯 싶다.

문제가 이쯤 되자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라는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있었다고 들었다. 자연계를 기피하는 학생들을 무작정 탓할 수도 없다.

어려운 공부뼈빠지게 해본들 고시를 하는 것처럼 장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서 대접도 제대로받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뛰어들 수 있겠는가.

과학자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비롯하여 대대적인 기초과학의 육성, 과학대중화, 이공계 출신의 활로 개방등 개선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이런 모든 문제들의 가장 밑바닥을 깔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과학교육의 문제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예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지극히 '원시적인' 교육체제부터 뜯어 고쳐야 한다.

그리고 대학은 인문학과 과학을 고르게 가르칠 수 있는 '기초학문대학'을 마련하여 학생들을 받아야한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외국의 명문대학들이 여전히 이른바 문리과대학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수학은 물론 과학적 방법론은 모든 학문의 근본이다. 문과라고 해서 수학과 과학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경제학만큼이나 수학을 많이 필요로 하는 학문이 과연 몇이나 있으며 과학적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인문학 분야가 진정 얼마나 있을까.

문과와 이과의 구분도 따지고 보면 일제의 잔재이다. 기왕에 대통령까지도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는 이 기회에 마지막 남은 '베를린 장벽'을 가차없이 부수길 원한다.

대통령의 결단과 교육인적자원부의 너그러운 협조를 기대한다.

/서울대 생명과학부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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