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광화문 거리에서 만난 예쁜 미니버스가 잊혀지지 않는다.지붕에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을 흩날리며 달려가는 그 작은 버스는 동화의 나라에서 온 '단풍잎 뿌리는 자동차'처럼 보였다.
화창한 햇살 속에 노랑색 빨강색 잎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나는 그 차를 따라 달리며 운전자가 누구일까 상상해 보았다.
숲에 차를 세워두었던 게으름뱅이가 낙엽도 털지않고 달려 나온 걸까. 아니면 이런 해프닝을 하려고 일부러 예쁜 단풍을 모아 지붕을 덮은 멋쟁이 일까.
남루한 한옥 지붕에 은행잎이 쌓여있는 것도 보았다. 그 집은 황금이불을 덮고있는 것 같았다.
나무는 참 많은 일을 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진 낙엽까지 작은 지붕을 덮어주고, 삭막한 거리에 '단풍잎 뿌리는 자동차'를 보내주다니.
세월이 갈수록 나무가 좋아지고,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진다. 나무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그를 신뢰하기도 한다.
성격이 까다롭거나 다소 고약할 수는 있어도 나쁜 사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나무를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천리포에 갔었다.
민병갈(81. 미국이름 칼 페리스 밀러)씨는 한국에 와서 50여년 사는 동안 수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그가 천리포의 야산 20만 여 평에 일군 수목원엔 7,000여 종, 2,000만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특히 목련은 400여 종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의 수목원 중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세계 목련학회, 호랑가시나무학회, 수목회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턴에서 태어나 2차 대전 때 미 해군 장교로 한국에 처음왔던 밀러씨는 79년 아예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한국은행과 쌍용증권에서 일하면서 한평생 번 돈을 나무 키우는데 다 썼으니 독신으로 살아온 그에게 나무들은 자식들, 손주들이나 다름없다.
그는 주중에는 서울에서 굿모닝증권 고문으로 일하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천리포 수목원으로 내려와 나무들을 돌본다.
내가 내려간 날은 마침 천리포 수목원 후원회원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후원회원들은 일년에 6만원 이상의 회비를 내어 수목원을 돕고 있다. 대부분 어린 자녀들과 함께 온 회원들은 수목원을 돌며 즐겁게 나무들과 인사했다.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운동을 펴고 있는 유한킴벌리의 문국현 사장도 후원회원으로 참가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워 했다.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들이 후원하는 수목원의 나무들과 만나는 하루는 행복했다.
금년 한해를 암과 싸우며 지냈다는 민병갈 할아버지는 수목원에만 내려오면 기운을 얻는다고 말했다.
천천히 숲을 걸으며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그의 병세는 최근 위독한 상태였다는데, 나무들속에 있는 그는 환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무들과 이별하지 않고, 영원히 나무들과 함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에 숲처럼 좋은 것은 없어요, 숲은 영원한 미완성이예요. 숲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거든요"라고 '나무 할아버지'는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와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다. 칼 페리스 밀러라는 미국인은 이 나라에 와서 수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천리포 바다가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은 푸른 눈의 귀화한 한국인에 의해 아름답고 깊은 숲이 됐다.전세계에서 모아 들인 희귀종들이 한국의 흙에 뿌리를 내려 힘찬 줄기를 뻗고 있다.
그는 나무를 심음으로써 이 나라에 새로운 문화를 남겼다. 이 세상에 와서 나무를 심고 가는 사람처럼 멋진 사람이 또 있는가 라고 천리포 수목원은 말한다.
그가 심은 나무들을 돌아보려면 하루 내내 걸어야 한다. 영원한 미완성인 숲은 그가 떠난 후에도 계속 자랄 것이다.
그가 이 땅에 남긴 '숲을 만드는 문화'도 계속 자랄 것이다.
장명수 발행인
msch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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