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거나 외면하는 무척 슬프고 아픈 인간들의 사연이나 모습을 포착한다.느리게 “그게 말이지”로 시작해 “재미있지 않아?”라는 반문으로 끝나는 그 재담꾼의 이야기는 ‘예외’일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그냥 웃고 지나치지 못할 삶의 아이러니나 배반 같은 것이 스며있다. 그래서 늘 웃음 뒤에는쓸쓸한 표정을 짓던 육상효(38·사진)였다.
1993년 그가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영화’를 선택한 것도 그 웃음과 쓸쓸함의 아이러니를 좀 더 재미있게, 많은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는 “소극적 인간들의 억눌림을 코미디 장르로 분출시켜 보려는 욕망, 영화가 갖는 공명심 때문”이라고도 했다.
‘장밋빛 인생’ ‘금홍아 금홍아’ ‘축제’의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영화 ‘슬픈 열대’ ‘터틀넥스웨터’를 만들고, 미국 남가주대학(USC)에서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8년 반이란 긴 시간을 통해 그는 그 ‘재미’와 ‘욕망’을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방식을 배웠다.
그리고 한 달 전 첫 장편 영화 ‘아이언 팜(Iron Palm)’을 찍기 시작했다. 머나먼 이국 땅 로스앤젤레스에서.
낡아서 버려진,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소로만 이용하는 로스앤젤레스 외곽 옛 시립교도소에서 막바지 촬영이 한창인 그를 18일 만났다.
때마침 박찬호 선수도 촬영현장을 찾아 평소 친하게 지내는 주연 배우 차인표에게 “이 영화는 잘 될 것 같다”라는 덕담을 남기고 돌아갔다.
-어떤 영화인가?
“5년 전에 헤어진, 바에서 소주칵테일을 만드는 여자 지니(김윤진)를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온 최경달(차인표)이란 남자의 사랑찾기를 담은 캐릭터 코미디다. ‘아이언 팜’은 그의 영어 이름이다. 또 그가 뜨거운 모래 대신 전기밥통으로 손을 단련하는 ‘철사장’을 뜻하기도 한다. 실제 주변인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학교 과제로 쓴 시나리오였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누구나 갖고있어 말하기 싫어하는 약점을 잘 희화해 ‘인식의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왜, 캐릭터 코미디인가?
“마음의 고통을 손끝으로 치환해 견디는 ‘철사장’의 무모함이 우스꽝스럽듯 고통을 희화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소주도 같은 맥락이다. 아이언 팜이란 인물에게는 ‘불합리한 진지함’이 있다. 돈키호테처럼 현실성이 없지만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집념, 그것이 주변환경과 부조화를 빚어 일으키는 충돌이야말로 캐릭터 코미디의 전형이다. 처음부터 차인표를 염두에 두고 썼다. 약간 뻣뻣한 연기 톤까지 코믹한 요소로 상승작용을 하는것을 보면 그가 이 인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에서 시나리오 공부를 한 것이 어떤 도움이 되나?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다. 웃음을 구조화하고,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코믹 타임’을 배웠다. 코미디가 일상을 벗어난 ‘쇼’가 아니기 위해서는 좀 더 있을 법한 스토리의 중요성, 그리고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꾸미는 방법도 알았다. 잃은 것도 있다. 한국에서 시나리오를 쓸 때 가졌던 ‘무모한 진실’ 같은 것.”
-현지 스태프와 작업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철저히 계획해서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스케줄이 없으면 감독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 시간이 없어 못 찍으면 그 장면은 잃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촬영을 단순화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외롭다.”
-데뷔작이 로스앤젤레스라는 무대, 해외 제작이라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
“3년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느낀 것을 시나리오로 썼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 뿐이다. 나 역시 ‘이방인’이란 정서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 매번 시나리오에 한국인, 히스패닉이 등장한다. 이곳을 비버리힐스가 아닌 코리아타운이나 멕시칸이 사는 변두리로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한국에서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까. 8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는 아직도 집단적 사고에 얽매여있다. 거기에서 벗어난 ‘개인의 코미디’를 하고 싶다. 이를테면 이상하게 집단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거나, 그냥 노래가 좋아 운동권 노래패에 들어간 사람 등이다. 대사나 이미지를 잘 엮어 그들의 진실이 담긴 코미디를 만든다면 얼마든지 사회적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
육상효 감독은 ‘노팅힐’의 작가 리처드 커티스처럼 누구나 소탈하게 웃을 수 있는 따뜻하고 인생이 담긴 코미디를 쓰고,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는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위안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그는 ‘나홀로 문화’에 익숙해야 하는 이국생활과 조금씩 무거워지는 나이에서 오는 쓸쓸함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 온 8년 반보다 지금이 오히려 초조하다고 한다.
“이제는 할 줄 아는 게 영화밖에 없다. 나도, 관객도 소외되지 않는 영화를 만들겠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코미디 작가주의’의 길이다.”
/로스앤젤레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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