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전쟁 얘기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전쟁을 겪지 않은 많은 유럽인들은 환호했다고 한다.독불 국경에는 '파리로 가자!'는 외침과 '베를린으로!'라는 구호가 엇갈렸다.
쌓인 원한을 시원스레 풀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팽배했다. 전선으로 향하는 앳된 병사의 총구에 꽃을 꽂아준 애인과 부모, 전쟁 지휘자까지 크리스마스에는 그들이 귀환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무기 발달로 속전속결될 것이라던 전쟁은 인류 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적 지구전(持久戰)이었다.
독가스까지 무차별 사용한 참호전에서 수백만 명이 스러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돌아오기까지 네 해째 크리스마스가 전쟁속에 지나갔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극명하게 실증한 전쟁으로 유럽은 승자와 패자 모두 쇠퇴했고, 세계 질서 주도권이 미국에 넘어갔다.
모든 전쟁은 재앙이다. 크리스마스는 축복이다. 그래서 총소리에 환호한 유럽인들도 크리스마스에는 평화와 사랑의 도래를 찬양하는 캐럴 송을 부르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며칠 전 영국의 한 논객은 이를 '모든 좋은 전쟁은 크리스마스전에 끝나야 한다'고 시니컬하게 규정했다.
21 세기 첫 전쟁, 아프간 전쟁도 서구인들에게 '좋은 전쟁'으로 인식되는 상황을 개탄한 것이다.
아프간 전쟁은 서구 문명세계에는 좋은 전쟁일 수 있다. 야만적 테러 세력을 응징한다는 목적을 이룬 때문만이 아니다.
이슬람 세계에 반 서구적 극단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통제권과 안정된 석유 공급원을 확보하는 숨은 의도도 달성했다.
비록 전쟁의 최대 표적으로 선전한 빈 라덴은 놓쳤지만, 예년처럼 기쁜 성탄을 노래할 만하다.
그러나 전쟁으로 얻는 평화는 예외없이 숱한 희생을 바닥에 깔고 있다. 아프간도 자유와 축복을 얻었다고 선전하지만, 산타클로스가 세상 모든 어린이를 행복하게 한다는 설화를 곧이 믿으라는 것과 다름없다.
언론 접근이 봉쇄된 전쟁 와중에 얼마나 많은 아프간 인이 희생됐는지 누구도 모른다.
또 수백만 명이 난민으로 떠돌고 있다. 국제구호단체들은 산악 오지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숱하게 희생될 난민들 걱정이 태산 같다.
여성 해방도 가공에 불과하다.
억압의 상징인 전통 의상 부르카를 벗어 던진 극소수 도시 상류 여성이 국제 언론을 장식했지만, 아프간 여성 대부분이 탈레반 집권 전과 마찬가지로 부르카를 고수하고 있다.
여성이 가장 자유로웠던 때는 공산 정권 시절이고, 질서와 치안이 가장 좋았던 때는 탈레반 치하였다는 지적은 정곡을 찌르는 아이러니다.
포악한 군벌과 이기적 외세가 장악한 아프간에서 진실로 축복할 구석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 소말리아와 수단, 이라크 등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확대할 태세다. 온 누리에 충만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는 이미 복 받은 자들을 위한 것 일뿐, 힘이 지배하는 인류 사회에서 소외되고 핍박 받는 이들에게는 머나 먼 앨라배마의 종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전쟁 명분을 쌓기 위해 미 육군 연구소에서 나온 탄저균을 이라크와 북한이 공급했다고 허황된 역정보를 퍼뜨린 전쟁 세력과 추종적 언론은 이제 북한제 무기가 탈레반에 흘러 갔다고 떠든다.
탈레반의 최대 지원국은 파키스탄을 앞세운 미국과 사우디였던 사실을 왜곡하고 국제 여론을 현혹하는 황당한 선전이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평화를 명분삼지만, 인류에 축복을 안긴 전쟁은 없다.
이를 잊은 채 전쟁 논리에 귀 기울인다면, 테러와의 전쟁도 크리스마스를 수십 번 지나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거리의 캐럴 송에 들뜨기에 앞서, 축복에서 소외된 아프간과 이라크와 북한 민중을 위한 진정한 사랑과 평화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마음이 아쉽다.
힘 센 나라와 약한 나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평화 공존을 기원한 글을 충남 당진에서 보낸 어느 독자의 따뜻한 마음을 함께 나누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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