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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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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입력
2001.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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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을 되찾고 지키는 것이 유난히도 어려운 시절이다.안과 밖에서 너나 없이 긴장되고 격앙되어 서로 부딪치지 않는 것이 그야 말로 상책인 그런 시기이다.

이런 때에 누가 와서 요새 무슨 낙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 다면 그냥 웃어버리기는 커녕 누굴 놀려, 노려볼 참이다.

그러나 늦은 밤 잠 들려고 할 때 이른 아침 잠에서 깰 때 나 또한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파트 방안에 화분에 심겨진 작은 나무가 서 있다. 잎들이 무성한 벤자민이라는 나무이다.

이 방에 들어온 지 4년쯤 되는데 가운데 줄기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만 가지들이 자라고 있다. 오른쪽 가지들은 웬일인지 잎들이 나다가 시들어 버려 한쪽으로만 자란다.

작은 나무에 가지들이 잘려나간 자국이 서 너개나 된다. 나는 이따금씩 그 자국을 만져보기도 하고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놀이터에서 잘도 뛰노는 뒷다리가 하나없는 이웃집 강아지 생각을 하기도 한다.

폭격 맞아서 무릎 아래가 없어진 아프간 어린 소년의 웃는 얼굴을 생각하기도 한다. 아무튼 나무는 상큼하다. 지금처럼 겨울에는 푸른 잎들이 보기도 좋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을 열어 놓고 주전자 물이 끓는 동안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안에 있는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기도 한다.

5층 방에서 내다보는 아파트 풍경은 그런대로 괜찮다. 얼마전까지 황금빛이던 은행나무들이 단정하게 서있는 것이 보이고 어린이 놀이터가 보이기도 한다.

놀이터에는 늦은 아침이나 이른 오후에는 노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저녁무렵이면 주민들이 맹렬하게 걷기 연습을 한다.

이른 아침이면 잠에서 덜깬 사내녀석이 느릿느릿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것도 보인다.

다시 눈을 방안으로 돌려 잎들을 바라본다. 잎사귀 하나가 문득 움직이는 듯 하다가 멈추기도 하고 잎사귀 여러 개가 한꺼번에 사르르 떨기도 하고 나뭇가지들이 다같이 살랑 살랑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동안 정적. 그러다가 다시 반복하며 떨리며 흔들린다. 그들이 흔들리는 것을 한참동안 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것들은 그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창밖에 있는 작은 소나무 가지도 흔들리고 그 옆에 있는 플라타너스 가지도 움직인다. 아파트 공중에 구름이 퍼져가고 한강둔치에 강물이 흐르고 비둘기 날개가 퍼득 떨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모두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흔들리는 것은 살아있다는 표시인지 모른다.

아니 흔들리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 있어서 흔들리고 풀리고 다시 흐른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이 흔들림 속에는 더 큰 법칙과 배합과 순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가령, 이 겨울에 안에 있는 잎들이 흔들리는 것은 대기중에 바람이 불고있는 것이고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이 열려있는 것이고 푸른 잎들이 자라도록 누군가가 물을 주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흔들림을 감지하는 눈과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잎들이 산들거리며 위로 아래로 양분들을 나르는 동안나는 조금씩 편안해지고 가벼워진다. 마음속에 굳어있던 무거운 것들이 떨리면서 흩어져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동안 부드럽게 너그러워지는 마음. 곧 사라지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며 헤어지고 만나며 흐르는 것이니까.

이래서 작은 나무는 한쪽으로만 자라지만 오늘도 건재하다. 보이지 않는 저마다의 짐을 저 좋아서 하나씩 껴안은 채 오늘도 삶이 계속되는 것처럼.

무슨 낙으로 어찌 사느냐고 누가 또 물으면 이제는 그냥 웃을 일이다.

/서숙 이화여대 영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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