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세월 역시 부정되어선 안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선언으로 끝나는 소설이 있다.이소설을 읽으면 이러한 선언의 근거가 되는 한 가계의 상경기와 그들이 서울에 마련한 괴불마당집에 얽힌 사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엄마의 말뚝’은 송도(松都) 인근에 위치한 박적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젊은 엄마가 어린 남매와 함께 자리를 잡아가는 이야기다.
셋방살이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인왕산 아래 현저동 꼭대기에 집을 마련한 엄마가 감개무량하여 말한다.
“기여코 서울에다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기쁨과 아쉬움이 섞인 이 말 속에는 지난 시절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던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 담겨 있다.
일신의 입신이든 가문의 영예든, 목적을 향해 적수공권으로 길 떠나는 사람의 흉중만큼 거룩한 것은 없다.
소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을 말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 ‘부정되어서는 안될 그 무엇’에 대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 무엇’을 이렇게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우린 현저동 괴불마당집을 잊지 못했다. 특히 어머니는 늙어가실수록 더 심했다. 무엇이든지 그 시절하고 대보려 드셨다.’
한 문장도 보태고 버릴 것 없이 이어지는 이 회고담 소설은, 가능성의 힘이 그러하듯이 지나간 세월의 힘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이 명작인 까닭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투영해 볼 수있는 근거와 여유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의 말뚝’을 읽은 것은 이십여 년 전,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현저동 꼭대기 고모님댁에서 였다.
그곳에서 독립문과 퇴계로를 지나 학교에 다니던 스무 살짜리 천둥벌거숭이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가 놀던 골목길을 걸어다니면서, 소설가가 되지 못한다면 어쩔까 하는 불안에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내게 이 소설은 자신과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운명적 연관성을 비끌어 매주는 주술적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날을 돌아보며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성공을 해도 까무라칠 정도로 성공한 셈이다.
최근 나는 소설선집 작가의 말에 ‘내 아들과 같은 지난 날의 내가 지친 나를 부축하고 있다’고 썼다.
‘엄마의 말뚝’ 말미에는 소설의 화자가 사십여 년 만에 어린 시절 자신이 살던 괴불마당집을 찾아보는 장면이 있다.
이와 같이 나도 곧 이십여년 전 내가 ‘엄마의 말뚝’을 읽던 현저동 꼭대기를 찾아가 볼 작정이다.
그곳에 박았던 나의 말뚝은 이 소설을 읽던 날의 감동과 같이 건재한 지 돌아봐야겠다.
/마르시아스 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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