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사와 요미우리신문사가 월드컵을 앞두고 공동주최해 온 한일 교류좌담회의 제5차 행사가 11월28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하코네(箱根)의 유모토후지야(湯本富士屋)호텔에서 ‘대중문화교류의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열렸다.참석자들의 발언내용을 요약한다.
△우메하라= 지금까지 조선통신사, 한국 개항시기에 일본이 행한 역할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고대의 문화교류 등을 토론했습니다.
이번은 현대 이야기입니다. 1998년한국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비롯된 한일 문화교류를 토의하지 않으면 요즘 한일관계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어령= 일본 TV드라마에서젊은 남녀가 ‘김치’라고 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생활 속에서 서로의 문화를 주고 받고 있습니다.
1998년에 대중문화를 개방할 때 일본영화의 일방적인 한국시장 잠식과 일본문화 유입으로 인한 한국문화의 정체성 상실 등 두 가지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일본의 ‘러브레터’가 일본에서는 40~50만의 관객을 동원했지만 한국에서는 120만명이 보았고, ‘쉬리’도일본에서 140만명을 동원했습니다. 최근 한국영화는엄청난 발전과 비약을 했습니다.
반드시 일본영화 개방에 따른 긴장감과 경쟁의식, 자구책에 의해서였다고 말하긴 힘들지만그 자극으로 대형 히트작이 나와 할리우드영화의 점유율이 낮아졌습니다.
문화교류의 중요성, 금지보다는 푸는 것이 서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역사와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융합할 수 있는 기회가 두절됐던 양국의 문화는 대중문화 개방으로 더 풍요로워지고 있습니다.
먹는 문화,듣는 문화에서 이제는 보는 영화와 패션으로 한국의 대중문화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두 나라 간의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두 나라의 대중문화가 대만중국에 끼치는 영향 등 동북아시아 전반의 문제까지 살펴보면서 문화교류의 방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요모타=저는 1970대 한국에 체재하면서 한국의 영화를 많이 보고 일본에 전하고 싶은 생각에서 글을 써 온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30권 정도 책을 썼지만,그 계기는 미지의 뛰어난 영화감독과의인터뷰라는 특이한 경험에서 시작됐습니다.1970년대 도쿄(東京)에서 한국영화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에 가 보니 만화도 로큰롤도 있고, 청춘영화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소개하면서 시작됐는데, 1980년대 한국영화를 도쿄에서 상영하는 일, 영화배우 안성기(安聖基)씨를 초청해 인터뷰하는 일 등을 했습니다. 그 때까지 일본에서는 북한의 영화는 조총련이 소개했지만한국영화에 대한 소개와 지식은 거의 없었습니다.관객도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 재일한국인의 손자ㆍ손녀들이었습니다.
90년대 들어 ‘쉬리’ ‘JSA’ 등의 영화가 히트를 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영화를 소개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매년 한 번 정도 영화보러 가거나 인터뷰하러 갔는데 지금은안해도 됩니다. 한국에서 히트친 영화는 시차는 있지만 일본에서 개봉영화로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관심은 한국의 60, 70년대 영화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로 기울게 됐습니다. 부러운 것은 국립조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장소(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등을 말함)가 한국에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일본의 영화아카데미즘에 대한 조치는 한국에 비해뒤떨어져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문화를 이해할 때 처음으로 사용하는것은 입입니다. 문화의 이동경로는 입에 이어 귀, 문자, 머리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전후일본에서는 한국인의 불고기와 양념에 매우 익숙해졌고 친근감을 갖게 됐습니다. 슈퍼에서 김치를 파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습니다. 입과 귀는 거짓말을 못합니다. 맛있고듣기 좋으면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것이문학 철학이라는 하이 컬처(HighCulture)적인 것인데 우선입과 귀가 준비되지 않으면 거기까지 가지 못합니다.러시아의 문예연구가 시크로프스키가주장한 이론입니다. 즉 서브 컬처(Subcultureㆍ어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행동양식과 가치관을전체로서의 문화라고 할 때 그 전체적 문화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어떤 점에서는 독자적 특질을 나타내는 부분적 문화)를 증폭한 후에 하이 컬처가 생긴다는 이론입니다. 한국문화를 일본이 받아들일 때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닌가합니다.
저는 작년 한국 중앙대에서 일본영화사를 강의했습니다. 그 때 한국 영화연구가들과 1965년작 ‘맨발의 청춘’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성일(申星一) 엄앵란(嚴鶯蘭)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제가 어릴 적에 보았던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와 하마다 미쓰오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진흙 속의 청춘’과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그 때 한국인친구들은 그것이 매우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기뻤습니다. 똑 같은 스토리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 같은 마음이 있었다는 반가움, 똑 같은 타입의 멜로드라마, 감수성의 동질성에 대해 감동을 느꼈습니다. 감수성의 동질성이라는 것에 반가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의 관심은 한국과 일본의 멜로드라마에 있어서의과정묘사 방법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강제규=저희 영화계도 일본과 한국 제작자연맹 등을 통해 여러 가지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작을 활성화할 것인가등 여러 가지 논지를 가지고얼마 전에 일본의 제작자 30분을 한국에 초청,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또 최근 일본영화제에 한국 영화제작자들이 초청받아 다양한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서로의 영화발전에기여할 수 있나, 나아가 아시아영화 발전의 기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전 세계는 모든 산업분야에서 그 나라의 자체경쟁력보다는 세계라는 하나의 공통분모 안에서 파악되는 세기를 맞고 있습니다. 자동차회사,금융권 등도 대통합의 움직임을 보이고있습니다. 한국에는 현재 문화관광부에 등록돼 있는 영화사가 800개에 이릅니다. IMF 직전 100개 정도였던 것에 비해 8배이상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한국영화의 붐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제작사가 이제는조금씩 생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새로운 통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시장에서 생존하고 살아 남기 위해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재능과 경험을 결합하는 형태로 변형되는 과정에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한국과 일본이 미래에 문화와영화발전을 위해 어떻게 협력하고 도와야 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할리우드는전세계에서 80% 이상 시장 점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재 우리 앞에 다가온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시장의 변화는 중국입니다. 동아시아시장에서 추후 아시아의 어떠한 세력과 힘이 동아시아의새로운 문화산업의 기틀을 마련하느냐 못하느냐의 중요한 기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러한 기능을 못한다면, 대안제시를 못한다면, 13억 인구의 거대한 시장 중국을 그대로 놓치게 되는 것은자명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시장의 새로운 질서라는거시적인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위해 실질적으로 어떻게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협력하느냐,어떻게 한국과 일본과 중국을 벨트화시킬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어령=사와 도모에씨가 어제 만찬석상에서 ‘나는 누군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도모에씨의 입장만이 아니라 사실 할리우드문화에 젖은 한일의젊은이들은 나는 누군가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면하고 있었지요. 유럽의경우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마지막까지 타결하지 못한 것이 영화였습니다. 단순한 무역품목이 아니라 그것은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과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세계시장의 80%를 차지하는 미국영화와 대중예술로 미국인의 생활방식이 곧 글로벌 스탠더드처럼 되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한일의 젊은이들은 좀 달라요. 벌써 사와 도모에씨와도 세대차이가 생겨서 이제는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누가 나인가’로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영화를 보면서 “아, 저게 나구나”,혹은 한국인이 ‘러브 레터’를 보면서 “내가 저기 있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가을동화’라는 TV드라마에 탤런트 송혜교가 체크무늬 옷을 입고 나오는데 중국에서는그것을 ‘송혜교치마’라고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송혜교에서 찾고 대만에서는 한국 탤런트 누구의 얼굴을 닮도록 성형수술을 해달라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유럽만 바라보던 일본에서도 ‘누가 나인가’에 대해 아시안을 포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할리우드영화가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아시아의 대중문화는 반대로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기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영화가 왜 세계시장의 80%를 점유하는가 하면,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성공하면 전세계에서 성공할수 있게 됩니다. 문화가 다른 여러 민족들에게 모두 어필해야 합니다. 그것처럼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시장이 아시아지역으로확산하게 되면 그만큼 그 문화는 다양성을 띠고 나가서는 세계성을 띠게 될 가능성도 많습니다.
△사와 도모에=저는 이런 일한 문화교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가렵다’ 라고나 할까 표면에서나 말한다고 할까, 일한 간의 이야기는 어떠한 터부를 갖고 말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저는 어떤 입장에서 이런 모임에 참가해야 하는지 항상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몸 속에서 일한이 교류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일한교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교류를 하고있습니다. 일한 문화교류를 생각할 때 초조한 것은 정치 경제 역사를뒤섞어 복잡하게 언급하는 것입니다.저는 한 사람의 가수로서, 표현자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모임에서 나를 ‘일한의 가교’라며 마치 대단한 사람처럼 이야기하는데 저는 이것을 완전히부정하겠습니다. 이미 가교는 걸려 있다,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을 통해 만들어졌다, 나는 그 다리를 너무 쉽게 건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관련이 된 것은 두살에서 여섯살까지 한국에 살았던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다음은 미국에 살았고, 스무 살 때 일본에서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로 10년 정도 몰두했습니다. 여자의 입장인 나, 크리스찬인 나, 한미일 문화에서 자란 나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 계기가 노래였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노래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한국어로 노래 불렀습니다. 아버지의 고향 오이타(大分) 현에서도 불렀어요. 1996년 한국에서 노래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들 놀랐습니다. “일본어로 노래부르면 안된다는 것 너 아느냐”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지요. 그러나 주저하지 않고, “한국어로 노래 부를까요”라고 생각을 전환했습니다. 한국이 개방 안 한다는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은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어로 작사 작곡한 노래를 한국어로 번역해 콘서트를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어떤 의미에서 역경이라고나 할까요, 그 속에서 풍부한 체험을 했습니다. 첫째 여섯살 때 멈추었던 한국어가 좀더 유창하게 됐습니다. 둘째로 내 노래를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결과적으로한일 양국에 어울린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나는 노래 번역은 하면 안된다는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일까요’가 자연스럽게 한국어로도 어울리는 노래가 됐고 그것은 반가운발견이었습니다. 셋째는 노래 자체가 풍요로워졌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본어는 모음이 아 이 우 에 오 5가지 밖에 없지만 한국어는 한국어의 모음은 일본의 3배나 됩니다. 그래서 감각 리듬 숨결 등이 풍요로워져 나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넷째로는 아티스트로서 강해졌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청중은 일본과 너무나 다릅니다. 이렇게 차이가 있는지 재미있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일본 청중은 다른 사람이 박수치는 것을 확인하고 박수를칩니다. 그러나 한국청중은 스스로 열중하는 모습이 어디가 무대이고어디가 객석인지 모를 정도입니다.어떤 때는 가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합니다. 이런 청중은 세계적으로 봐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항상 따뜻하고 흐믓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반면에 한국 청중은 무조건 아무때나 박수를 치는경향도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아주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엄숙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공통점은 독창성이 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문화를 계속 카피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양국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일본에서 공연시스템을 가지고 가기보다는 한국의 현장에서한국인들과 함께 새롭게 작업하고 있습니다.미국적인 것은 커다란 테두리라는측면에서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이라는 강력한 충돌을 통해 발생하는 것을피부로 느꼈습니다. 즐겁게 생각하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가수와 듀엣을 하거나 교환 콘서트를 할 때 번거로운것도 있지만 즐거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중요한 것은 문화교류는 그 자체를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 동안 문화교류라는 말은 싫증이날 정도로 들어왔지만 나에게 있어서 일한교류는 어디까지나 결과입니다. 사람들이어느 날 보니 “아, 양국이 교류하고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결과적인 모습을보고 싶습니다.
△이영혜=고등학교 때 ‘빙점(氷點)’이라는 미우라 아야코(森浦綾子)의 소설을 우리반 전체가 봤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부모가 불렸던 옛날 일본노래를 들은 적있습니다. 그 후에는 일본문화에 대한 기피감정을 갖고 성장했습니다. 빙점을 볼 때도 책상 밑에서 봤습니다. 해적판이었던 같습니다. 요즘에는 드러내놓고 일본문화를 감상하고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전후세대입니다. 전후세대에게는 자기 자신이 중요합니다. 온라인을 통해 그냥 좋은 것을 자기가 채용하고, 그걸 이용해 자기의 강점으로 만들기가 아주 수월한 세상이됐습니다. 일본것이 어떻고, 중국것이 어떻고 하는 것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써보고 좋으면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퓨전 등으로 표현하지만, 그것을 부추기는 것이 디지털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판분야는 현재 어느 때보다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너무 책을 안 봅니다. 그러나 출판이라는 아날로그 인프라는 영화 비디오 게임 등으로도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출판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분화돼가는 세상에서 독자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책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음악 요리 등 분화된 세계가 있을 뿐이지 이미 국경은 의미가없어졌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웃으면서 옛날 한국인의 우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한국인이 옛날에 일본에 와서 농업을 가르쳤다고 하는등의 이야기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별 감동이 없습니다.한국은 지금 일본에서 많이 배우고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우리 연예계가 잡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가 이전에 무엇을 주었다는 것은 의미를 상실해가고있습니다. 대중문화산업의 결과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안도감을 느낍니다. 지금이야 말로 아시아는 젊은 세대의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동안은 서양의 것을 일본과 한국이베끼고, 사취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창조의 시대입니다. 아시아가 자신감을 갖고 창조해야 하는 시대를 맞아, 한일보다는 동아시아가 트렌드를 제시해야 하는 때가 아닌가생각합니다. 문화를 산업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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