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김 살해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진행되면서 조작ㆍ은폐의 내막이 드러나고 있다.이무영 전경찰청장과 김승일 전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이 수사중단 지시ㆍ청탁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이해구ㆍ이학봉 전 의원 등 1987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고위 간부도 소환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 중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결같이 '몰랐다'거나 아니면 '윗사람이나 다른 기관의 압력을 받아 할 수 없이 했다'는 식이다.
심지어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고위 공직자 출신으로서의 책임의식이나 소신은 찾아볼 수 없고 '네 탓' 공방만 벌이고 있다.
이 전 청장은 "사건 내용은 물론이고 '수지 김'이란 이름도 듣지 못했다"고 발뺌했다.
경찰개혁을 이끌며 법치와 책임을 강조하던 경찰총수의 변명치고는 너무나 옹색하다. 국정원쪽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김 전 국장은 "엄익준(사망) 차장의 지시로 할 수 없이 이 청장에게 사건을 설명했으나 수사중단 청탁은 하지 않았다"며 다른 기관과 망자(亡者)에게 책임을 씌웠다.
87년 당시 안기부간부들도 "나는 관여한 적이 없고 모르는 일"이라며 윗선에 화살을 돌렸다.
살인사건이 간첩사건으로 둔갑하는 과정에 아무도 개입하거나 지시한 사람이 없다니 해도 너무하다.
물론 냉전논리가 지배하던 권위주의 시대에 일어난 일이고 정보기관이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나름대로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임질 자리에 있던 공직자가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모습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솔직히 털어놓고 역사 앞에 사죄하는 공직자의 모습이 기다려진다.
배성규 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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