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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잊지못할 일] 도서관 몸소 안내한 '윤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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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잊지못할 일] 도서관 몸소 안내한 '윤교수'

입력
2001.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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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은 20살이었고, '전국 대학생 논문발표대회'에 제출할 논문을 준비하는 중에 필요한 문건들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도서목록이 미리 구비된 것도 아닌데다가, 폐가식(廢架式)의 도서관에서 비전문직 직원들을 상대로 얻을 수 있는 '문헌정보'는 한심할 정도로 빈소했다.

별무 소용으로 그들과 몇 차례 언쟁을 벌이던 나는 망설임 끝에 '윤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매미소리 짙은 여름날의 오후였다.

연구실의 문에는 대나무발이 무릎까지 흔들리며 길게 쳐져 있어 실내는 사뭇 어둑시근한 분위기였고, '윤 교수'는 하아얀 모시 적삼 차림으로 단정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인사를 하면서 얼핏 살피니 그는 사전을 뒤적이면서 헬라어로 쓰인 낡은 책에 마음을 쏟고 있는 중이었다.

훗날 그가 시대의 운명을 온몸으로 선취(先取)하고자 했던 진정한 민족주의자였으리라는 추정을 하기 전까지, 나는 종종 그가 강의했던 서양철학과 이 하아얀 모시적삼 사이의 거리를 혼자 속으로 공글려보곤 했다.

잠시 사연을 설명하고 도서관 서고에 들어가서 직접 책을 고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윤 교수'는 스스럼없이 읽던 책을 덮고는 따라오라고 했다.

철벽같았던 도서관 직원들을 가볍게(?) 따돌린 채 나는 '윤 교수'의 안내로 먼지 깊은 서고에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나는 겹겹이, 그리고 층층이 도열해 있는 그 무수한 책들의 장엄한 풍경에 경탄의 눈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눈부신 정신의 관병식(觀兵式)이란!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서고에 들어온 목적을 잠시 잊어버린 채 홀린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책탐(冊貪)의 기운만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묵묵히 내 표정만을 살피던 '윤 교수'는 안경 너머로 느긋한 미소를 건네며 손가락 끝에 무게를 실어 살며시 내 어깨를 만졌다.

"어때, 여기 들어오니 좋지. 너두 이 담에 교수가 되렴." 그의 말과 그 순간은 진정 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윤 교수'가 이 말을 내게던진 그 날 이후 12년 만인 1990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곧장 그의 축원(?)대로 나는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 소식에 가장 기뻐해줄 '윤 교수'는 이미 내가 만날 수 없는 아득한 곳에서 소식없이 유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영민 한일장신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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