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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冊불법복제 교수가 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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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冊불법복제 교수가 막자

입력
2001.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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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길을 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무심코 다가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었다.

어딘가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이고 눈 코 입의 윤곽이 좀 또렷하지 않을 뿐 어디를 봐도 영락없는 나였다.

그렇게 얼어붙은 채로 내곁을 유유히 지나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건 또 웬일인가.

나는 하나가 아니었다. 저쪽 길모퉁이를 돌아서는 여러 명 모두가 다 나였다.

어머니께서 쌍둥이를 여럿 낳으시고 내게 알리지 않으신것도 아닐 터인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그들도 나를 보며 조금은 놀라는표정을 짓곤 했지만 별 거리낌없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자기들끼리는 별로 어색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당장 벌어질 일은 아니지만 어쩌면 마냥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인간의 배아복제를 시도한 과학자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미래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서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벌써 우리들 등뒤에 숨을 죽이고 서 있다가 불현듯 우리를 놀라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죽기 전에 과연 이런 일이 벌어질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우리학술서적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겪어온 일이다.

어느 대학강의에 교재로 채택되었다고 해서 100권을 납품하면 서너권도 채 팔리지 않고 나머지는 몽땅 반품된다고 하니 그 책들이 복사본들 사이에서 겪는 황당함을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오죽하면 한국학술도서출판협의회가 최근 긴급회의를 열고 등록증을 자진하여 반납하기로 결정했겠는가.

우리사회가 총체적인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학술과 출판 활동이 이처럼 여지없이 무너지다니.

위기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또 다른 위기감이 나를 휘두른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던 시절은 오래 전에 우리곁을 떠났다. 지식이 창출되고 전파되는 양식이 달라져 지적소유권의 침해는 이제 경제는 물론 학문그 자체를 붕괴시킨다.

출판사들의 등록증 반납 기사가 실린 같은 신문에 '해리포터'의 작가롤링의 재산이 우리돈으로 1조2000억원이 넘을 것이라는 기사도 실렸다.

제아무리 잘 쓴책이라도 그 책이 만일 우리 나라에서 발행되었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이미 비슷한 유형의 책들을 수없이 많이 읽은 아들 녀석이 벌써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읽는 걸 보면잘 쓴 책임은 분명한 것 같지만, 일단 괜찮은 책이 나오면 기본적으로 출판사가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는 숫자의 책들을 전국의 도서관들이 구매해주는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몇년 전 내가 영국에서 출간한 학술서적이 일본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켜 급기야는 일본학자들의 초청을 받아 동경대학을 비롯한 몇몇대학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되어 결국 동경대학과 와세다대학에 있는 동료교수들과 한일공동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공동연구를 위해두 번째로 동경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동경대학 교수 부부가 새로 마련했다며 학교 앞에 있는 아담한 아파트를 내주어 편안하게 지낼수 있었다.

그런데 웬 아파트냐고 물었더니 그전 해 일반대중과 학문에 입문하려는 학생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쓴 진화 관련저서 두 권의 인세로 산 것이라고 했다.

나도 같은 기간대중을 위한 과학서적을 두 권씩이나 출간했건만 아파트는 커녕 그 푼돈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그 아파트가 달리 보였다.

일본에서 강연을 하러 가는곳마다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내가 펴낸 영문서적을 들고 와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퍽 민망했다.

일본 학생들에게 사인을 하며 언젠가 수업시간에 내 책의 복사본을 들고 나와 사인을 해달라고 하던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국내에서는 내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원서를 구할수가 없어서"라며 겸연쩍어 하는 학생에게 하는 수 없이 사인을 해주며 씁쓸해 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학술서적의 불법복제를 근절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것이다. 정부의 단속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불법복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교수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학기초에 학생들에게 늘 이렇게 말한다.

"이 교과서의 저자는 미국의 내 동료다. 그의 책이 불법으로 복제되는 걸난 못 본다. 복사본을 쓴다고 해서 여러분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구속력은 내게 없다. 점수를 깎을 수도 없다. 하지만 누구든복사본을 가지고 있다가 내게 들키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더이상 사제지간이 아니다."

누구는 "최고의 지성이라는 대학생이 아무생각 없이 복제품을 찾는다"며 개탄하지만 대학생은 아직 '최고의 지성'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올바로 가르쳐 최고의 지성을 만들어야 한다. 선생님들, 돌아오는 새 학기에는 제가쓰는 방법을 한번 써보십시오.

우리와 출판계 모두를 살리는 일입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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