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파리유학시절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 놀란 적이 있다.동물학대를 주제로 한 쌍방향 대담프로그램이었는데, 전화를 통해서 전달되는 청취자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들의 의견은 대개 이런 것이었다.
개나 고양이를 때리는 것은 어린 아이를 구타하는 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짓이다. 그런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고, 다만 화가 치밀 뿐이다.
개나 고양이를 죽이는 야만인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청취자들은 프랑스의 평범한 시민들, 특히 노인들이었다.
이 방송을 듣고서 서양인이 개나 고양이에 대해서 느끼는 친밀감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마 한국의 보신탕에 대해서 서양인이 갖는 혐오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우리는 개고기를 먹을 때 이런 서양인의 심성을 한번쯤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여배우 바르도를 비롯해서 개를 먹으면 안 된다고 악쓰는 서양인들도 우리와 같이 정에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좋으나 싫으나 앞으로 점점 더 한 식구처럼 살아야 하는 지구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론의 차원에서 '개고기를 먹으면 야만'이라는 등식은 수도 없이 깨졌다.
1930년대에는 엘리아스의 문화론이, 1950년대에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1960년대에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의 철학과 부르디외의 사회학이 한결같이 그런 등식의 배후에 있는 전제를 질타했다.
그 전제는 백인의 문화가 가장 진보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믿음이며, 인류의 역사가 백인의 문화를 선두로 단선적으로 발전한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이다.
문명과 야만, 문화적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서양인의 구분은 그런 신념에 기초한다.
20세기의 학문은 이런 신념이 어떤 허위의식에 불과함을 신물이 나도록 폭로했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과정의 결과를 역사를 초월한 선험적가치로, 역사적 과정의 이념으로 잘못 놓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르도 같은 인사를 설득시키려고 너무 애쓰지 말자.
책을 읽고 공부 좀 하라고 타이를 것도 아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조급하게 덤벼들지도 말자.
서양에는, 무엇보다 프랑스에도 남의 음식을 가지고 야만이니 아니니 하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야만이요 몰상식한 월권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다만 이점을 생각하자. 서양인이 보신탕을 혐오한다면, 이는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감성과 미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거부감이다.
이 거부감은 이성적 자각 뒤에도 여전히 남을 것이다. 비록 보신탕을 비난할 도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도, 서양인은 계속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 볼 것이며, 한국에서 중요한 국제적 행사가 개최될 때마다 개고기는 특종의 기사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는 몇몇 편집자에 의해서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를 훼손하는 데 악의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사실 음식과 요리는 심미적 감수성의 본령이다. 특히 서양인은 아름다울 미(美)와 맛 미(味)를 구분하지 않는다.
보통 취미라 번역되는 서양말들, 가령 영어의 테이스트(taste)가 그런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고, 미학에서 그 말은 아름다움을 식별하고 즐길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보신탕 애호가들이 세계의 대중들 앞에서 도덕적으로 손가락질 당할 객관적 근거는 분명히 없다.
어떤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주관적 근거, 즉 심미적 근거뿐이다. 어떤 문맥에서 이 심미적 근거는 사소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가령 연인 사이의 사랑, 친구 사이의 우정, 그밖에 감정적 차원의 모든 의사소통에서 심미적 역량보다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세계인을 친구로서 포용하고자 한다면 보신탕 애호가는 그 음식에서 맛과 건강을 구하되 미를 구하는 여유를 길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보신탕 주변부터 아름답게 만들어 놓자.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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