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나는 그처럼 아름답고 색다른 풍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본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내 어릴 적 꿈을 상기시켜 주는 장면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마술사가 빚어놓은 그 무엇처럼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숭례문’이었다.”
1883년 12월, 은둔의 땅 조선에 닿은 미국인 청년 퍼시벌 로웰은 서울의 첫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서양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은둔의 땅 조선이 그에겐 마냥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조선인의 흰옷과 느리고 우아한 움직임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고도 썼다.
‘내 기억 속의 조선,조선 사람들’은 서양인이 쓴 가장 오래된 조선 방문기다.
지은이 로웰(1855~1916)은 명왕성의 존재를 밝혀 유명한 천문학자. 1885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출판된 이 책을 공교롭게도 천문학자 조경철 박사가 미국의 로웰 천문대에서 발견해 번역했다.
조선에 왔을 때 그는 스물 여덟 살이었다.
주일 외교대표를 겸해 일본에 머물던 중 1883년 한미수교조약이 성립됨에 따라 미국에 파견되는 조선사절단을 안내한 인연으로 고종 황제의 초청을 받아 그 해 겨울을 서울에서 보냈다.
이 책은 1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을 정감 어린 눈길과 빼어난 문학적 필치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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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박사가 美서 발견·번역
당시 조선의 풍물과 생활상을 정치ㆍ경제ㆍ사회ㆍ지리 등 다방면에서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젊은이 다운 왕성한 호기심으로 낯선 세계를 이해하려 애썼다. 그는 고종 황제부터 수학자, 서당 학동, 시장 상인, 빨래터 아낙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야간 순찰을 도는 순라꾼을 붙잡고 질문을 퍼붓는가 하면 탑을 보려고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는 등 극성스러울 만큼 적극적인 모습이 책 곳곳에 보인다.
서양인의 조선 방문기는 그 동안 여러 권 나왔지만, 이 책은 남다른 점이 있다.
단순한 인상기를 넘어 조선과 조선사람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을 시도한 것이 그 하나다. 그는 ‘매혹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보이는’ 조선 사회의 지배 원리로 비개성적 특질, 가부장제, 여성의 지위 부재를 꼽았다.
여기서 그는 몇 가지 오류와 왜곡을 범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인과 일본인은 모두 타타르족’ ‘가부장제는 유목민 시절의 타성’ 이라는 기술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지은이가 천문학자답게 풍부한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깊이 있는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조선의 사계나 지리를 설명하는 대목, 조선 수학자와 나눈 대화 등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은 빼어난 글솜씨로 쓰여져 재미나게 읽힌다. 그는 남산의 봉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은 점차 짙은 먹물을 불러들이고, 어둠 속에 묻힌 산은 마법에서 풀린 듯 갑자기 더 높은 꼭대기에서 별 네 개를 토해낸다.”
이처럼 서정적이고 기품 있는 문장이 계속 이어진다.
조선은 그에게 “몇 백년 전의 옷, 예절, 사고방식, 그리고 생활양식 등이 옛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과거의 땅”으로 비쳤다, 그러나 미개하거나 가련한 건 아니고,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의 나라로 보였다.
그는 편견 없이 조선의 참모습을 보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는 고종 황제의 어진을 비롯해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들어있다.
구한말 서울 풍경과 조선 사람을 담은 이 사진들은 타임 캡슐을 꺼내는 듯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조경철박사가 美서 발견·번역
1978년 미국의 한 천문대에서 연구하고 있던 조경철 박사에게 오랜 친구인 미국 천문학자 호에그 박사가 찾아왔다.
그는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의 로웰 천문대 도서관에서 천문학자였던 퍼시벌 로웰의 저서 몇 권과 사진첩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중 한 권이 100여 년 전의 한국 방문기라는 것이었다.
조 박사는 그렇게 중요한 책이라면 한국에 진작 소개됐겠지 하고 무심히 넘겼다.
그런데 귀국 후 알아보니 로웰이란 이름도, 그 책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1982년 국제 학술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플래그스태프에 들렀다가 문제의 그 기행문을 직접 찾아 읽을 수 있었다.
로웰의 사진첩에서 고종 황제의 어진을 발견하고 흥분했다. 그로부터 4년 만인 86년 조 박사는 이 책을 직접 번역했고 절판이 된 책이 이 번에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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