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6일 구한말 일제 시기의 정치인 윤치호가 자결했다. 향년 80세.윤치호는 충남 아산사람이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했으나 정변이 실패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에서 개신교도가 된 그는 선교사 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에유학해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했다.
1895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만들어회장으로서 교육사업에 힘쓰는 등 개화파 애국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합방 직후에 105인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 받기도 한 그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의 길로 들어서 조선 기독교계의 일본화 작업을 주도하고 일본제국의회의 칙선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근자에 그의 일기가운데 일부가 ‘윤치호 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일기를 써 남겼는데 그 대부분이 영어로 쓰여졌다.
이 일기는 한 섬세한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의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서북파의 지도자인 안창호씨가 이런 말을 했단다.
‘먼저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뒤에 독립해야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1931년 1월8일) “나는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화하려는이 열병(창씨개명)이 꽤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처사라고 생각한다.
다양성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당연히 다민족으로 구성돼야 한다.”(1940년 1월4일)
“지금부터 56년 전 처음 상하이에 갔을 때, 잘난 체하는 영국인들의 조계에 있는 공원어귀에 중국어와 영어로 ‘개와 중국인 출입 금지’라는 글귀의 긴 표지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설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1941년12월11일)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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