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사투였다. 2패 뒤 3연승. 돌부처 이창호 9단의 뚝심만이 이룰 수 있는 승리였다. 아슬아슬한 명승부가 5국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공격수 유창혁도 이창호라는 큰 산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9월 13일 시작된 도전기는 80일간의 대장정을 거쳐 결국 이 명인의 타이틀 방어로 끝이 났다. 이로써 이 9단은 명인 4연패와 통산 10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조훈현 9단이 1997년 28기 명인전에서 이 9단에게 2연패뒤 3연승으로 극적인 우승을 거둔 뒤 처음 있는 역전 우승기록이다.
이창호 9단은 “힘들었다. 기쁘다. 최고 권위의 명인전을 방어한 것도 그렇지만 2패 뒤 3연승이라는 결과에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말했다.
1993년 24기 대회에서도 3대2로 아깝게 무릎을 꿇은 유창혁 9단은 다시금 국내 기전 무관의 설움을 삭여야 했다. 초반 1, 2국을 이길 때만 해도 유 9단의 첫 명인위 타이틀 획득이 유력해보였다. 하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이창호 9단의 마력에 현혹된 탓일까. 유 9단은 또 패배했다. 그는 아쉬움에 할말을 잃었다.
5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이 9단에게 2승 뒤 3연패를 당한 이세돌 3단.그 역시 “그렇게 진다고는 생각 못했다. 마술에 홀린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 만큼 이창호 9단의 32기 명인전 역전우승은 철저한 승부사만이 이룰 수 있는 뜻깊은 승리였다.
■공격 실패한 유창혁
최종국이 벌어진 4일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는 초반부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유창혁 9단은 대국 시작 시간인 오전 10시 10분 전, 이창호 9단은 그 5분 뒤에 입장했다. 비장한 표정이었다. 돌을 가린 결과 이 9단의 흑번. 유창혁 9단은 고개를 떨궜다. 흑번이 아무래도 공격에 유리하다. 공격적인 기풍의 유 9단으로서는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진행은 팽팽했다. 착실히 실리를 챙긴 이 9단. 이에 맞서 유 9단은 견실한세력을 쌓으며 대처했다. 그러나 가만히 집만 짓고 있을 유창혁이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명성답게 초반부터 싸움을 걸었다. 유 9단이 백36으로 좌상귀에 뛰어들면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다.
쌍방 복잡한 싸움에서 각자 백52, 흑53으로 연달아 강펀치를 날리며 전투는 이어졌다. 그러다 유 9단이 던진 수가 백56. 좌상귀 흑을 압박하기 위한 착점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공격이었을까. 이어 백68로 상변에서 끊은수가 무리수였다. 흑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면서 흑은 우상귀에서 큰 집을 형성했다.
그러자 백은 세력을 쌓아 중앙에 집을 지으려는 의도로 나왔다. 이때부터 바둑은 흑 우세 분위기로 흘렀다. 상변을 사석작전으로 마무리한 유 9단은 백88로 중앙경영에 나섰지만 흑의 삭감작전에 밀려 고전하기 시작했다. 흑105의하변 응수타진에 백106으로 곱게 이어준 것이 유창혁 9단의 또 한 번의 실착. 그 답지 않게 공격을 머뭇거렸다.
결국 집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흑111로 우변에 집을 지으면서 마무리에 들어간이 9단은 백116 우하귀 공격을 적절히 막아낸 뒤 안전한 수를 두며 반면 10집 차이의 승리를 거뒀다.
■당대 최고기사만이 오른 명인위
조남철, 김인, 서봉수, 조훈현, 그리고 이창호. 1968년 시작된 명인전은 이 다섯 기사에게만 명인 자리를 허락했다. 모두들 당대의 최고 기사였다.
단판승부를 벌였던 초대 명인 결정전. 한국 현대바둑의 대부 조남철 9단(당시8단)이 41연승을 달리던 김인 9단(당시 7단)을 물리치고 첫 명인위에 올랐다. 절치부심한 김인 9단이 2기 명인전 우승을 차지한 뒤 나타난기사가 서봉수 9단. 서 9단은 2단이던 1971년 4기 명인전에서 첫 본선에 올라 도전기까지 승리를 거두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했다. 그래서 서 9단의 호칭은 ‘서 명인’으로 통했다.
서 9단의 6연패 아성을 무너뜨린 기사는 조훈현 9단. 그는 이후 12차례나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며 화려한 전성기를 이어갔다. 이창호 시대 역시 1991년 첫 명인 자리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그는 조 9단에게 명인위를 내준1997년을 제외하고는 양재호, 최명훈, 유창혁 등 모든 도전자를 물리쳤다. 유창혁 9단은 두 번째 도전에 실패하면서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됐다.
이제 32기 명인전은 막을 내렸다. 최강자 이창호를 꺾을 새로운 승부사를 33기 명인전은 기다리고 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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