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후 세계를 믿고, 갖가지 가설을 설정하는 것은 삶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지옥이나 천당도 ‘이승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역설일 것이다.
때문에 죽음 앞에서 인간은 회고적일 수밖에 없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은 이승에서의 존재 확인이며 죽음의 세계에 대한 위안이다.
그 ‘확인’과‘위안’의 의식이야말로 죽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천당도 지옥도 가지 못하는 영혼이 머문다는 ‘림보(Limbo)’.
일본 영화‘원더풀 라이프’(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에서 그곳은 ‘기억’의 공간이다.
생전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억을 찾게 해 천국으로 인도한다.
감독은 죽은자의 천국이란 다름아닌 이승에서의 가장 행복한 그 순간의 기억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라고 감성적으로 말한다.
1998년 부산영화제에서 ‘사후’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원더풀 라이프’는 삶과 죽음의 공간에 특별한 경계를 두지 않는다.
마치 살아 생전의 모습 그대로 림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억을 되살려 영화로 재현해 주기 위해 끝없이 인터뷰를 시도하고, 죽은 자들은 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영화는 젊은이에서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들려주는 삶의 기억으로 슬픔과 웃음을 엮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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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누구는 어린 시절 이웃 오빠와 춤추던 추억에 행복해 하고, 또 누구는 대나무숲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먹던 시절을 기억해 내며, 또 다른 할머니는 꽃잎 날리던 그 봄날로 돌아간다.
스스로 삶에 열정이 없었다는 와타나베란 남자는 다른 남자를 마음 속에 둔 아내 쿄코에 대한 질투심을 극복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영화를 보고 공원 벤치에 앉았던 가을날을 간직하기로 한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자기 사랑이며,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의 확인이다.
그 사랑은 약혼자였던 쿄코를 잊지 못해 림보에서 일하는 모치즈키(아라타)와 시오리(오다 에리카)의 영혼에까지 스며든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을 꼽으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그것을 기억하려는 순간 당신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될 테니까.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한 우리의 영혼은 외롭지 않다.
이 정도면 ‘멋진 인생(원더풀 라이프)’이 아닌가.
변혁 감독의 ‘인터뷰’가 모방을 했다는 오해를 받을 만큼 형식이 비슷하다. 수 백 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해 골라낸 아마추어 배우들로 돌발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까지.
그래서 억울하다. 그 때문에 독창성에 대한 놀라움이 반감되고 다소 지루하게 느낄 관객도 있으니까.
시네큐브 광화문이 개관 1주년 기념작으로 8일부터 상영한다.
/이대현기자leedh@hk.co.kr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만약 나에게 이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림보에 남아서 계속 영화를 더 찍을 것이다. 아직 3편 밖에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11월 말 서울을 다녀간 코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사진ㆍ39) 감독은 제작한 지 3년이 지난 자신의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는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들이 “뭘먹으러 갈까”라고 말하지 말고, 일상을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길 바랬다.
“사후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죽음의 반대편에 있는 삶을, 그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로카즈 감독은 1995년 ‘환상의 빛’으로 데뷔해 1998년 낭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원더풀 라이프’(1998년)와 올해 칸 영화제 장편 진출작인 ‘디스턴스’(2001년) 3편으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끌었다.
젊은 감독으로는 “의외다” 싶을 정도로 독특한 소재나 구성으로 현실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현실에 대한 그의 올곧은 시선은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 미나마타병 희생자에 무관심한 정부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인 서대문 형무소, 명성황후 시해장소인 경복궁, 서울시청을 둘러보며 “일본이 가해자였음을 잊으면 안 된다. 오직 돈만 밝히던 일본이 거품이 꺼지자 옛 군국주의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모습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직접 제작, 배급, 홍보까지 맡은 ‘원더풀라이프’는 일본에서도 1개 극장에서만 개봉했었다.
일본이라고 작가영화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 “영화유통의 개선만이 상엽영화와 작가영화의 극단적 이분화를 막는 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그는 “내면의 긴장감이 살아 있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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