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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얼음 굴리기'

입력
2001.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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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이가 큰 얼음 한 덩이를 손으로 밀고 간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음은 차츰 녹아 발로 찬다. 얼음이 탁구공처럼 작아지자 이번에는 두 발로 몰고 간다.

지난 6월5일부터 8월19일까지 서울 선재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이미지 스케이프- 멕시코 미술의 오늘'에 출품된 프란시스 알리스의 작품이다.

그는 멕시코시티에서 8시간 이상 얼음을 밀고 다니는 행위를 5분 가량의 비디오로 기록했다.

얼음을 밀고 다니는 것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얼음은 완전히 아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제목은 '때로는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때가 있다'(Sometimes making something leads nothing)이다.

우리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 진입한지 만 4년이 됐다.

그 동안 참으로 쓰라린 경험이 많았고,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지금 곰곰이 지난 4년을 돌아보면 오래 전에 보았던 이 작가의 작품이 머리 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그 기간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했고, 얼마나 이루어냈을까. 결국 얼음을 밀고 다닌 것에 불과했던가.

한강 다리가 갑자기 끊어지고, 백화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을 때 외국 전문가들은 두 번 놀랐다고 한다.

우선은 어째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고, 다음으로는 그런 사고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수준 높은' 보고서가 즉시 나온 것을 두고 서다.

우리가 '경제주권의 상실' '6ㆍ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던 IMF체제에 들어갔을 때도 이와 비슷했다.

우리가 왜 이런 치욕을 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분석과 처방은 거의 완벽했다.

그래서 기업 금융 노동 공공 등 4대 부문의 개혁이 최우선순위임이 강조됐고, 모두 이에 합의했다. 개혁의 청사진도 제시됐다.

국민들은 장롱 속 깊숙이 두었던 금붙이를 자진해서 꺼냈고, 실업과 감봉의 어려움도 '통과 의례'라며 견디어 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정부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는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실제 피부로 느끼는 분위기는 그렇지가 않다.

자신들의 노력이 부족해 아직 이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 64조원이면 충분하다던 공적자금은 150조원이 넘게 투입됐지만 그 성과는 어느 정도인지 또 앞으로 얼마가 더 필요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감사원의 공적 자금 특감 결과는 국민들을 실망케 하고, 분노케 한다. 당국은 도대체 무엇을 했고,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는 이처럼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일까.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보고서도 공적 자금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개혁에 앞장서야 할 정부 관료들이 오히려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한국 경제의본질적 개혁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관료집단의 이기주의 때문이라며,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었다.

정부 관료들이 어떤 반론을 펼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기업 노동 등 다른 분야도 비슷하다. 각종 '게이트'에서 보듯 끼리끼리, 그것도 막대한 돈을 해 먹는 판이다.

어느 것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최근 경기 회복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외국 언론들은 자만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내년에는 계층간 소득격차가 더 벌어져 '10대 90 사회'가 현실화할 것이라는 국내 민간 경제연구소의 조사 결과도 나왔다.

내년에는 '사생 결단'식의 선거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또 '삼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상호 논설위원

s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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