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김용석·이승환 지음철학자와 철학자가 만나 길고 깊게 대화를 나눴다.
철학에서 출발해 역사와 현실을 아우르는 다양한 주제를 놓고 진지한 성찰이 오갔다.
다섯 달 간 다섯 차례에 걸친 공식 대담만 30여 시간, 수시로 주고 받은 e-메일이 210여 통이다. 상대방의 생각과 의견을 조심스레 탐색하는 것으로 시작해 서로의 접점을 찾아 논의의 실마리를 풀어가다 충돌하고 논쟁하고 그러다가 공감의 영역을 발견하고 서로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 책은 서양철학자 김용석(전 이탈리아 그레고리안대 교수)과 동양철학자 이승환(고려대교수)의 대담집이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만남 혹은 두 철학자가 함께 한 지적 여행의 기록이다.
그들의 입말을 그대로 옮겨 특별한 생동감을 간직하고 있는 이 책은 토론다운 토론을 보기 힘든 오늘날 우리 지식인 사회의 척박한 토양을 갈아 엎는 쟁기질이다.
첫 만남은 서로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됐다. 어떻게 철학을 공부하게 됐냐, 전공이 뭐냐는 질문으로 물꼬를 트더니 오늘날 철학 교육의 문제며 인문학의 위기, 철학자로 산다는 것의 고민 등으로 자연스레 번졌다.
두 사람은 ‘이 땅에서 철학하기’의 반성을 공유한다. 김용석은 “우리는 시대에 따라 서구 사상에서 일부 눈에 띄는것을 가져와 편식하며 유행시킬 줄은 알았어도 서구 사상 체계 전체를 항상 조망하면서 비판할 줄은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진단한다.
이에 이승환은 “모방을 통한 근대화는 한 단락을 고했다”며 “이제는 창조하려는 노력, 나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필요한때”라고 강조한다.
동서양사상과 문명의 핵심 개념을 주고 받는 것으로 대담은 본 궤도에 오른다.
그로부터 서구식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근대성의 한계와 대안, 자아 정체성등 오늘날 철학이 고민하는 주제들이 다뤄지면서 두 사람은 자주 부닥치고 심각한 논쟁을 벌인다.
김용석이 서구사상의 특징으로 애지(愛知), 형이상학적 상상력과 과학과의 긴밀한 관계, 패러독스를 말하자 이승환은 그게 어찌 서양만의 것이냐는 반박과 함께 굳어버린 개념으로 동ㆍ서양을 가르는 거친 이분법을 비판한다.
이에 김용석은 ‘특성을 알아보는 것’과 ‘구분 짓기’는 서로 다르다는 설명과 함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으로 ‘열린 보편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열린 자세’ 덕분에 두 사람은 여러 번 충돌하면서도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생산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보다 공통점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은 동, 서는 서,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하리’라던 키플링의 예언은 대담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녹아버린다.
긴 대담을 마치며 주고 받은 편지에서 이승환은 “이번 만남은 그동안 서로 갈등해왔던 동양과 사양, 근대 문명과 근대가 아닌 문명,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위한 작은첫 걸음”이라고 대담의 의의를 정리했다.
대담 내내 때론 과격하게 느껴질 만큼 공격적으로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동양사상의 잠재적 가능성을 옹호했던 그는 ‘각자의 차이와 다양성을 승인해주면서 서로 협력하자‘는 다짐으로 결론을 대신하고 있다.
이 책은 핑퐁게임을 보는 듯한 긴장감과 흥미를 자아낸다.
김용석의 부드럽고 차분한 논법과, 이승환의 뜨겁고 재치있는 어법이 대조를 이루며 독서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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