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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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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와일드

입력
2001.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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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1월30일 아일랜드의 문인 오스카 와일드가 파리에서 죽었다. 44세였다.와일드는 시, 소설, 극작, 평론 등 글쓰기의 모든 장르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예술을 이끈 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표어로 요약되는 탐미주의였다.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런 탐미주의가 표출된 대표적 작품이다.

이 소설은 유미적 쾌락주의에 이끌려 악과 관능의 세계에 탐닉하는 도리언이라는 청년의 파멸 과정을 그렸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더 잘 알려진 작품은 동화 ‘행복한 왕자’일 것이다. 금과 보석으로 감싸인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의 몸뚱이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떼어준다는 이 이야기다.

와일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동성애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동성애는 결혼 이후 본격화했다. 결혼 이전에 그는 이성애자로서 수많은 여자들에게 채였다. 와일드의 첫 사랑은 플로렌스 발콤브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와일드를 버리고 브램 스토커(공포소설 ‘드라큘라’의 작가)와 결혼했다.

와일드는 결국 콘스탄스 로이드라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이내 그녀에게 싫증을 내고 또다른 사랑을 찾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상이 남성들이었다.

와일드의 가장 유명한 애인은 ‘보시’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귀족 출신의 앨프리드 더글러스다. 보시가 와일드보다 15살 아래였다. 그 둘은 깊이 사랑했지만, 보시의 아버지 더글러스경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시절 동성애는 형법상의 범죄였다. 그는 와일드를 고발했고, 와일드는 2년형을 선고받고 레딩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출옥 뒤에 파리로 가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 와일드의 격언 하나. 유혹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것에 굴복하는 것이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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