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27일 국어학자 이희승이 93세로 타계했다.이희승의 호는 일석(一石)이다. 이 일석이라는 호를 빗대 그를 아인슈타인(독일어로 ‘돌 하나’라는 뜻) 박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일석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 전문학교에서 가르쳤다.
1942년 일제가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터뜨린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해방 이튿날까지 감옥살이를했다. 해방 뒤에는 줄곧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석은 외솔 최현배와함께 일제 시대와 해방 뒤의 국어학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각각 이른바 연전파(연희전문파)와 성대파(경성제대파)의 수장으로서 국어학의 두 흐름을 주도했다.
한자 혼용 문제를 비롯해 몇 가지 점에서 이 두 사람은 견해를 달리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우정에 장애가 되지는않았다.
국어학쪽의 업적에서는 일석이 외솔에게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일석은 이화여전 시절부터 문학을 가르친 데서도 드러나듯, 국어학자이면서도 문인을 겸했다.
일석은 또 군사독재정권에 대해 꼿꼿했던 몇 안 되는 선비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일석의 ‘추삼제(秋三題)’는가을과 관련된 주제 세 개를 시조로 읊은 것이다.
우선 벽공(碧空).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를/ 드리우고 있건만.”
다음은 낙엽.
“시간에 매달려/ 사색에 지친 몸이// 정적을 타고 내려/ 대지에 앉아보니/공간을 바꾼 탓인가/ 방랑길이 멀구나.”
끝으로 남창(南窓).
“햇살이 쏟아져서/ 창에 서려 스며드니// 동공이 부시도록/ 머릿속이 쇄락해라//이렇듯 명창청복(明窓淸福)을/ 분에 겹게 누림은.”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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