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에 대한 테러나 다름없어요. 정부가 쌀 수매를 거부하고 대책없이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려는 것은 450만 농민을 대상으로 한 테러행위입니다. 즉각 중단해야지요”지난 24일 가을걷이가끝난 경남 고성군 거류면 감서리 봉림마을은 풍년가 대신 정부에 대한 독설(毒舌)과 농민들의 한숨으로 그득했다.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50여㏊의 넓은 들판엔 예년과는 달리 늦가을 논갈이로 분주한 손길을 찾아볼 수 없고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또 마을 입구엔 수매를 못한 벼 더미와 농기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마을 전체가 ‘농한기’(農寒期)를 맞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봉림마을은 오래 전부터‘부자 마을’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난해 고품질의 쌀 생산을 위한 저농약ㆍ유기농법으로 경남도 최초의 농민 브랜드인 ‘소가야 고향쌀’ 을 개발, 특허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주민들은 불과 1년만에 풍년가대신 ‘쌀값 보장’이란 머리띠를 두르고 가을 들녘이 아닌 시위현장으로 나서고 있다.
이 마을 출신의 황영주(黃英珠ㆍ56) 쌀전업농고성군연합회장은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장려금이나 농가소득안정자금 등의 지원책도 없이 양곡유통위원회가 내년도 추곡수매가를 4~5% 인하하겠다는것은 농민을 다 죽이겠다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쌀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건다는 게 450만 농민들의 한결 같은 마음일 것”이라며“왜 우리가 벼 가마니 야적투쟁에 나설 수 밖에 없는지 정부가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씨와 함께 벼 야적투쟁을벌이고 있는 박윤수(朴潤守ㆍ52)씨. 지난 95년 정부의 기계화 영농시책에 맞춰 농협에서 7,000만원의 영농자금을 대출받아 트랙터와 이양기,콤바인 등 10여대의 농기계를 구입했다.
그래서 한때는 고성군내에서 기계화 영농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수확은 어떻습니까?”라는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연신 담배연기만 내뿜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1만2,000여평의 논에 벼농사를 짓고 있는 박씨는 지난 6월 몇십년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수없이 날밤을 새워가며 논에 물을 대작년보다 오히려 더 많은 650가마(1가마 40㎏)를 수확했지만 판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에게 배정한 약정 수매물량은 고작 70가마. 이정도라면 인건비는커녕 본전도 못 건지게 된다.
“부산에서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의 학비와 영농자금 상환을 그렇다 치더라도 낡아빠진 농기계들의 수리비라도 건져야 할 것 아닙니까” 절규하는 듯한 박씨의 호소에 기가 막힐 뿐이다.
솔직히 털어놓는 그의가계부를 보면 농민들이 왜 낯선 시위현장을 찾는지 알 수 있다. 연말까지 갚아야 하는 농약 값에다 비료대금, 영농자금 상환 및 이자 등 줄잡아 3,000여만원의 목돈이 필요한데, 정부가 수매량을 줄이고 가격마저 낮추면 도저히 희망이 없는 것이다.
“별 수 없잖습니까?또 빚을 내야지요. 이렇게 빚을 내다보니 95년에 7,000만원이었던 농협부채가 1억원 가까이로 늘었는데, 앞으로 그 빚을 갚을 수나 있을런지…”
마을 주민들은 그래서시위를 택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지난달 11일 분신이나 다름없는 벼 가마니를 군청과 농협앞에 쌓아놓고 철야 농성을 벌였고 지난 21일에는 전국농민대회에 참여했다.
이 마을에서 시작된 벼 야적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고성에서만 5,000여 가마의 벼가 이미 2개월째 주인 곁을 떠났다. 경남 전체로는 1만여 가마니에 이른다.
노부모와 1남3녀를거느린 황정간(黃正干ㆍ44)씨의 사정은 더욱 절박하다. 2억원으로 불어난 부채 상환은 차치하고서라도 매달 생활비ㆍ교육비로 60~70만원이 들어가지만 정부 수매로 손에 넣은 돈은 200여만원이 고작이다.
하는 수 없이 황씨는 지난달부터 고성읍에 있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간다. 황씨는 일찌감치 도시로나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다.
농촌을 지켜보는 농협측도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봉림마을을 담당하는 동부농협 외곡지소 이종진(李宗晉ㆍ44)씨는 “농가당 부채가 평균 3,000만원을 넘었지만 수매되지 못한채 수북하게 쌓여있는 벼 더미를 쳐다보면 영농자금 상환 독촉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이동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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