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의협)는 회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비교적 강성으로 분류되는 이들로 회장단을 새로 구성하고 최근 적극적인 정치활동참여를 선언하였을 뿐 아니라 15일 창립 93주년을 맞아 '의사윤리지침'을 선포하였다.의협이 의사윤리지침을 대대적으로 선포한 이유는 의사들의 의료행위에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또 사회에 생명윤리에 관한 논의를 촉발하는 데에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잠잠하던 논쟁이 잠에서 깨어났으니 목적은 이룬 셈이다.
의협이 1995년부터 준비를 했다는 이 지침은 이미 4월19일 채택하여 선포하려다가 부정적인 여론에 밀려 보류하였던 지침과 같은 내용이다.
이 지침이 긍정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판받는 까닭은 일부 내용이 현행 실정법에 명백히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회생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생명연장 치료술의 중단을 허용하고, 낙태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과 금전적 거래가 없는 대리모출산을 허용하며, 뇌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명시한 것이 그 것이다.
이 하나 하나의 쟁점은 윤리적 법적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주제들이다.
의협은 이 지침이 문제되자 의료계 내부의 '가이드 라인'에 불과하다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고 하지만 그리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의협이 인간의 생명권과 관련된 부분을 규율할 권한이 있는가와 함께 우선 그 절차적 정당성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특히 인간의 윤리생명과 관련된 사항은 실정법으로 입법할 때에도 사회적 합의 아래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의협이 무슨 권한으로 실정법과 배치되는 내용을 감히 규정할 수 있을까.
더구나 실정법에 위반되는 '가이드 라인'은 아무 효력이 없는데도 말이다. 의협은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광범위하게 참여한 토론회와 공청회를 거쳐 지침이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밀실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나라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된 논쟁을 어찌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렸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법과 의료현실과의 괴리에서 고민한 흔적은 역력히 보이지만그 괴리를 좁히자면 먼저 법개정 건의부터 하는 것이 올바른 절차일 것이다.
내용에도 문제가 있다. 지침 중 문제된 부분은 좁게는 환자에게 크게는 전국민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안락사(安樂死) 문제만 해도 1998년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보듯이 의사측은 회생불가능한 환자를 보호자의 요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치료를 중단하였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살인죄로 판단하였다.
아직 법원의 판단과 의료계의 판단에는 엄청난 인식의 차이가 상존한다.
생명의 단축없이 단지 죽음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안락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생명단축을 초래하는 안락사에 대하여는 인간 생명의 절대성과 안락사 남용에 따른 생명경시풍조 때문에 이를 인정하자는 측에서조차 그 요건과 관련하여서는 세계적으로도 논란이 많다.
안락사를 '인간으로서 품위있게 죽을 권리'로 포장하는 존엄사(尊嚴死)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의사들이 이 내부지침에 따라 생명연장 치료행위를 중단한 결과 실정법에 위반되어 처벌을 받을 때 의협은 어떤 책임을 부담하려고 감히 이 지침을 강행하려고 하는가.
의사윤리지침에서도 명시했듯이 "의사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는다.
이 존귀한 사명에서 출발하여 의사에게 엄격한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의협의 본분에 합당한 것이지만 입법에 관한 사항까지 담아 강행하겠다는 것은 본분과 지위를 망각하고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무책임한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은 윤리규범으로서 법의 한계를 나타내지만 그렇다고 아직 법이 허용하지 않는 사항을 윤리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것은 또다른 불법을 저지르는 것일 뿐이다.
백태승ㆍ연세대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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