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적 세계관에 대한 분명한 해독제”라는 한 미국 평론가의 말처럼 데이비드 린치(51) 감독은 유년의 몽환에 빠져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암울하고 비극적이며, 심리의 기저를 파고든다. ‘영혼에 대한 린치’, 바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다.
1977년 기괴한 이미지로 가득찬 ‘이레이저헤드’가 뉴욕에서 개봉했을 때, ‘최악의 영화’라는악평을 들었으나 아직도 심야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다.
‘엘리펀트 맨’으로 주류 영화판에 진입한 이후, 그는 ‘광란의 사랑’ ‘블루벨벳’과 TV 시리즈물 ‘트윈 픽스’를 선보이며 그는 미국에서 컬트 문화가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였고, 그것이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러나 99년 칸영화제에서 선보인 ‘스트레이트스토리(The Straight Story)’는 ‘정말 린치가 맞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야말로 ‘스트레이트한’ 휴먼 드라마.
그렇다고 이 영화를 근거로 ‘육체적 노쇠함이 사고의 안이함’까지 유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
그는 올해 칸영화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미국 조엘 코엔 감독과 공동 수상)한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를 통해 ‘린치 그 자체’를 다시 증명했다. 놀라운 것은 두 편의 영화 모두 같은 스태프과 만들었다는 점이다.
각본을 공동 작업하는 오랜 동료 메리 스위니, 음악감독 안제로 바달라멘티는 전혀 다른 양태의 영화에서 최대한의 매력을 발휘했다.
거장의 영화 장악력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 멀홀랜드 드라이브
할리우드의 영롱한 불빛을 감상하면서 달리는 멀홀랜드 로(路).
끔찍한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여자 리타(로라 해링)는 숨어 든 저택에서 배우 지망생 베티(나오미 왓츠)를 만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도입부는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 같다.
‘블루 벨벳’의 이사벨라 롯셀리니를 연상케 하는 로라 해링은 신비스러움 그 자체다.
그러나 린치는 자신의 전작에 영화를 끼워 맞추려는 관객의 심리를 비웃듯, 리타를 통해 비밀을 풀려는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비밀은 검은 머리에 고혹적인 입술의 리타가 아니라 50년대 미녀를 연상시키는 금발의 베티에게 있었다.
전반부의 미스터리는 후반부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리타와 베티는 원래 동성애연인 사이지만, 감독과 사랑에 빠져 할리우드 스타로 도약한 리타는 베티와의 사랑을 정리하려 하고, 베티는 청부살인자를 고용해 그녀를 죽이려 한다.
단선적인 스토리지만 린치는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보였던 몽환적 이미지와 각종 모티프를 통해 베티의 내면에 숨은 스타로의 욕망과 동성애적 열정의 실체를 드러낸다.
현실 세계에서 리타에게 빌붙어 사는 베티의 억눌린 욕망은 상상 속에서 리타의 조력자가 되게 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뒤집기는 카우보이를 통해서도 시도된다. 언제나 영화 속에서는 ‘정의의 사나이’의 표상이었던 카우보이는 철학적 화두를 꺼낸다.
실제와 환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로스트하이웨이’보다는 평이한 구조이지만, 할리우드는 물론 자신의 영화까지도 ‘뒤집기’를 시도한 린치의 시도는 더욱 깊어졌다.
“나의 영화는 언어로 구체화하지 못하는 비논리적인, 혹은 추상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린치의 해석은 영화 마지막 장면 반복되는 ‘실란시오’ ‘실란시오’라는 단어에 축약돼 있다.
실린시오는 ‘침묵’. 논리가 아닌 직감으로 대하라는 주문이다. 12월1일 개봉.
■ 스트레이트 스토리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처럼 당혹스럽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영화 사상 최고령 주인공을 내세운 로드 무비이다.
73세의 앨빈 스트레이트는 보행기를 이용하고, 대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형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난다.
아이오와에서 위스콘신까지 480㎞의 시속5㎞의 트랙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중풍에 걸려 쓰러졌다는 형을 만나 그간 의절하며 살아온 오해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 마지막 목표였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르겠다”며 3주간 7마리의 사슴을 치어 죽인 살연을 털어놓는 여성을 만나기도 하고, 낯선 이에게 자기 집 마당을 선뜻 내어주는 따뜻한 이웃에게 감동하면서 그는 6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형을 만난다.
세월의 오해를 푸는 데는 6주간의 여행 그 자체면 충분했다.
로이 로저스, 게리쿠퍼 등 할리우드 스타의 말타는 장면의 대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배우 리차드 판스워드가 79세의 나이에 앨빈 스트레이트를 맡아, 99년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더니, 이듬해에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해 그야말로 영화적인 인물로 남았다.
따스한 휴먼 스토리가 데이비드 린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엘리펀트 맨’에서 보였던 따스한 휴머니즘을 보였던 젊은 날의 린치와 이 영화가 월트디즈니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된다. 12월1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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