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정비는 아니지만 왕을 낳은 후궁(사친ㆍ私親) 7명의 신주를 모신 청와대 내 칠궁(七宮)이 21일 언론에 공개됐다.1968년 1월 21일 김신조씨 등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경호상의 이유로 출입을 금한 지 3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문화재청은 청와대 관람객 100만 명 돌파를 기념해 24일부터 일반에도 공개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칠궁내 고건물 다섯 채를 새로 단장하고 안내판, 관람로 등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칠궁은 육상궁(毓祥宮) 대빈궁(大嬪宮) 연호궁(延祜宮) 저경궁(儲慶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 등 7기의 사당이 모여 있다고 해서 붙은 속칭이다.
사적명은 육상궁. 원래 이곳에는 숙종의 후궁으로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만 있었다.
그러나 1882년 고종 때 화재로 소실된 이후 복원 과정에서 서울 주변에 흩어져 있던 다른 사친묘들을 합사하면서 칠궁이 됐다.
7,800여 평 규모의 칠궁은 크게 묘궁(廟宮) 관리인들이 기거하는 ‘재실공간’과 7기의 사당을 모신 ‘사당공간’으로 나뉜다.
정문인 외삼문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삼락당, 송죽재 등 재실 2채가 있고, 사당공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에 이르게 된다.
사당공간에는 오른편에 육상궁과 연호궁이, 왼편에 나머지 묘궁이 제사집기를 보관하는 이안청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육상궁과 대빈궁 가운데 공간에는 영조 친필 현판이 걸린 약수터 냉천정(冷泉亭)이 아름다운 정원과 어울려 자리잡고 있다.
역대 왕들은 냉천정에서 갈증을 해소했다고 한다.
칠궁은 조선시대 묘사(廟祀)제도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인 동시에 시민들에게 되돌아온 문화공간이다.
김철훈기자
chkim@hk.co.kr
■七宮은 어떤 곳
▼육상궁
1725년 즉위한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우를 잠저(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기거하던 집)에 모시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경복궁 북쪽 현재의 위치에 세우게 됐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이곳에 영조의어진(임금의 초상화)도 봉안했다. 1882년 고종 때 화재로 소실됐고 이듬해 중건됐다.
▼연호궁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사당.정조는 즉위 후 진종을 추존하고 정빈묘를 연호궁이라고 불렀다.경복궁 추성문 밖 서북쪽에 있던 연호궁은 1970년 고종에 의해 육상궁 내로 옮겨?병?.
▼저경궁
선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원종의 모친인 인빈 김씨의 신주를 봉안한 곳이다. 영조는 원종의 잠저인 송현동(현 한국은행 뒤편)에 있던 김씨의 사우를 저경궁이라고 칭했고,고종은 1908년 이를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대빈궁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묘궁이다 경종은 1722년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면서 사우를 낙원동에 건립했고,역시 고종에 의해 1870년 육상궁 안으로 옮겨졌다.
▼선희궁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사당이다.정조는 1788년 영빈묘를 선회로 개명하고 궁으로 만들었으며,고종때 육상궁과 신교동 선희궁 터를오가다가 1908년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경우궁
정조의 후궁으로 순도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이다.순조는 현재의 종로구 계동에 경우궁을 세워 신주를 모셨고,1908년 고종이 여러 사친묘를 합사하는 조치를 취함에 따라 경우궁은 육상국 내로 옮겨졌다.
고종은 1884년갑신정변을 맞아 이 곳에서 혁신 내각을 조직한 바 있다.
▼덕안궁
고종의 후궁으로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 귀비 엄씨의 묘궁이다. 1913년 현재의 태평로에 엄씨의 신궁을 만들어 엄비 묘로 하였으며 궁명을 덕안궁이라고 붙였다. 1929년 육상궁 내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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