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도시에서는 겨울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입동이 지난 지 보름이 다되어 가지만 여민 옷깃만으로 계절을 느낄 뿐이다.
겨울 풍경이 좋다면 기다릴 것이 아니라 맞으러 가자. 높은 산에는 이미 겨울 축제가 시작됐다.
구천동 계곡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덕유산(1,614mㆍ전북 무주군). 꼭대기에는 구름이 내려놓고 간 상고대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백련사까지 가는 길은 정답다. 덕유산의 얼굴인 삼공 매표소에서 약 5㎞.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이다. 비파담, 구월담 등 구천동 계곡의 33경이 길 옆으로 펼쳐진다.
긴 가뭄에도 흘러내리는 물은 깊고 맑다.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가는 길을 많이 닮았다.
낙엽은 거의 씻겨 내려가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하늘로 향하고 있다. 겨울 서정이 이런 것일까. 그 쓸쓸함 때문에 더욱 정답다.
백련사에는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구천동 계곡에는 원래 10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다.
전란과 풍파에 모두 없어지고 이제는 백련사가 유일하다. 신라 신문왕때 백련선사가 숨어살던 곳인데 흰 연꽃이 솟아 절을 세웠다고 한다.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세월의 더께를 이야기하듯 단청이 푸르스름하게 퇴색한 대웅전에는 ‘중창불사중’이라는 글씨가 내 걸려있다.
그러나 아직 망치소리는 없다. 대웅전 왼쪽으로 약 30보. 맑은 샘물이 솟는다. 물병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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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산행법
가는 길·쉴 곳·먹을 것
이제부터는 숨이 턱턱 막히는 힘든 산행이기 때문이다. 잔뜩 찌푸린 날. 백련사에서도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봉우리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절 오른편으로 난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매표소에서 백련사까지가 워밍업 코스라면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으로 오르는 이 길은 거의 유격훈련 코스이다.
약 4㎞에 불과하지만 대단한 인내를 요구한다. 발걸음과 보조를 맞춰줄 냇물 하나 흐르지 않는다. 미끄러운 흙길과 계단만이 계속 이어질 뿐이다.
매운 겨울의 맛이 이럴 것이다. 지루하면서 힘들다.
8부 능선에서 구름과 만났다. 힘든 산행에서 변화를 맞는다는 것은 반갑다. 땅으로 내몰렸던 물고기가 다시 물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구름 속에 든다.
앞에 가는 산꾼의 모습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흐느적거린다. 사위를 분간하기 힘든 지경까지 됐을 때, 갑자기 다른 세상에 왔다는 것을 느낀다.
잎을 털어낸 나뭇가지들이 새 잎을 달고 있다. 하얀 잎이다. 뽀얗게 가지를 덮고 있던 하얀 잎은 높이 오를수록 무성하다.
9부 능선쯤 됐을까. 눈이 내린 것처럼 천지가 완전히 하얗다. 상고대이다.
상고대는 일종의 눈꽃. 그러나 눈이 내려 쌓인 게 아니다. 구름이나 안개가 추위속을 지나가다가 나뭇가지나 바위에 붙어 얼어버린 것이다.
두터운 서리라고 보면 된다. 나름대로의 결정(結晶)을 지니고 있어 단순한 눈꽃보다 조형미가 있다. 사진작가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겨울 새벽산행을 하는 이유는 그 오묘한 결정을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덕유산의 상고대는 바람을 마주보며 피어있다. 북풍이 불면 북쪽으로, 남풍이 불면 남쪽으로 자란다.
아직 추위가 덜하기 때문에 수분이 흐르는 방향으로만 핀다. 영하 10도 이하로 수은주가 곤두박질치면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하얗게 된다.
드디어 향적봉 정상. 막바지 산길은 상고대의 위안으로 힘들지 않았다.
시계를보니 오전 10시 30분. 그런데 정상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다. 부지런도 하지. 그런데 사람들의 행색이 기이하다.
버버리코트 차림의 남자, 하이힐을 신은 여자 등등. 산을 오르는 복장이 아니다. 알고보니 무주리조트 쪽에서 관광곤돌라를 타고 오른 사람들이다.
향적봉 아래 설천봉까지 곤돌라를 타면 20분 산행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깔깔대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산에서 만난 겨울이 무척 반가운가 보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구름을 서서히 걷어냈다. 발아래로 낮게 깔리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하늘은 가을 하늘보다 푸르다. 멀리 지리산의 연봉까지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도 머리 꼭대기에 하얀 상고대를 이고 있다.
맑은 대기를 뚫고 태양이 거침없이 내리쬔다. 하얗던 세상은 햇살을 받고 녹아내린다. 구름이 걷힌 지 불과 30분, 산은 다시 잿빛이 됐다.
겨울의 전령 상고대는 그렇게 맛만 보여주고 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무주=글 권오현기자 koh@hk.co.kr
■가는 길
과거 무주는 오지에 속했다. 서울에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영동IC에서 빠져 구불구불한 국도와 지방도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4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지난 해부터 대전_진주간 고속도로(대진고속도로)의 대전-무주간이 개통돼 서울에서 채 3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21일 대진고속도로의 전구간이 개통되면 영남지방에서도 쉽게 무주를 찾을 수 있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까지 하루4회 고속버스가 운행하고 무주읍에서 구천동까지 약 20분 간격으로 군내버스가 왕복한다.
■쉴 곳
구천동 지역을 중심으로 숙박업소가 밀집해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무주리조트(063-322-9000). 티롤호텔, 국민호텔, 가족호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하루에 6,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스키 시즌이면 스키어들의 차지가 되지만 12월 초까지는 객실의 여유가 있다.
구천동 지구의 여관은 숙박료가 3만 원부터. 낡은 시설이 많아 반드시 객실을 확인하고 짐을 푸는 것이 좋다.
무주읍에는 50실 규모의 무주호텔(324-6000)을 비롯해 덕화리버사이드모텔(322-6900), 무주그린모텔(322-7231) 등이 있다.
■먹을 것
무주의 대표적인 맛은 어죽. 맑은 강물에서 잡아올린 자가미라는 물고기를 재료로 한다.
자가미를 삶아 뼈를 발라낸 후 쌀과 고추장을 넣고 푹 끓이다가 쌀이 익을 때 수제비를 떠 넣는다. 맛이 담백하고 소화가 잘 된다.
무주읍의금강식당(063-322-0979) 등이 유명하다. 고추냉이 생채백반도 특이한 음식. 고추냉이와 삶은 소고기, 닭고기가 조화를 이루는 음식이다.
고추냉이 특유의 맛 때문에 술안주로 인기가 높다. 무주읍의 두영회관(324-4733) 등에서 상을 차린다.
▼덕유산 산행법▼
덕유산국립공원에는 모두 8개의 등산 코스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코스가 집단시설이 있는 삼공 매표소에서 백련사를 거쳐 향적봉에 오르는 것.
약 8.5㎞로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백련사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는 평탄한 길이 고백련사부터 향적봉까지는 가파른 언덕길이다.
백련사에서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체력 조절을 잘 해야 무난하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하산은 같은 코스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나 인근의 중봉과 오수자굴을 거쳐 백련사로 내려오는 길도 있다. 약 20분이 더 든다.
힘든 산행이 불가능하다면 무주리조트(063-320-7000)의 관광곤돌라를 이용하면 된다.
곤돌라로 설천봉까지 오른 후 향적봉을 등정하고 백련사길로 내려가거나, 걸어서 향적봉에 오른 후 곤돌라를 타고 하산할 수도 있다.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는 약 20분. 관광곤돌라 요금은 편도 6,000원, 왕복 1만 원이다. 무주리조트 입장료 3,000원을 내야 한다.
곤돌라로 올라가 백련사로 내려왔다면 구천동 버스 주차장에서 무주리조트 셔틀버스로 다시 리조트에 갈 수 있다.
본격적으로 덕유산을 등정하려면 1박 2일의 일정이 필요하다.
종주 코스이다.남덕유산의 영각사에서 출발, 삿갓재-무릉산-0동엽령을 거쳐 향적봉대피소(063-322-1614)에서 1박한다.
1인당 3,000원. 이튿날 향적봉을 출발, 백련사 코스를 타고 하산한다. 그러나 이 코스는 겨울철 산불 방지기간(12월 15일까지)에는 등반이 통제된다.
덕유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063-322-3174)에서 운영하는 자연해설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도 좋다. 20명 이내의 인원이면 누구나 참가가 가능하며 특히 가족단위의 참가자를 환영한다. 사전에 예약을 해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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