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아침 8시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한가람 아파트 앞.통학버스를 기다리는 듯한 남자 아이들 몇몇이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전혀 위축된 기색이 없이 장난을 치고 있다.
여느 아파트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낯선 손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라는 것.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일본인학교에 다니는 일본아이들이다.
그 곳에서 멀지 않는 렉스아파트 상가의 ‘모노마트’ 냉장고 한켠에는 삿뽀로 맥주가 들어있고 일본어 상품가 붙은 간장 라면 초콜릿 과자 등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막 물건을 고른 한 주부가 계산대에서 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더니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선다. ‘사요나라’. 헤어지는 인사말이 어색하지 않다.
서울에서 리틀도쿄로 불리는 이촌동.
흔히 동부이촌동으로 불리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이촌 1동 일대다. 한가람 대우 강촌아파트들이 줄지어 들어선 큰 길가엔 붉은 종이등을 단 일본풍 음식점과 주점들이 쉽게 눈에 띄고, 부동산중개업소나 여행사의 유리문에는 일본어로 안내판이 붙여있다.
아파트 단지안으로 들어서면 놀이터엔 일본아이들이 한국아이들과 함께 미끄럼틀을 타고 있다.
한눈에도 일본여성임을 알아 볼 수 있는 주부들이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간다.
순간, ‘도쿄의 외곽의 한동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촌동에 ‘리틀 도쿄’가 들어선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인들은 이곳에 하나 둘 터를잡았고 1970년 한강외인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모여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본대사관과 무역상사 직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각계각층의 일본인들이 한가람, 대우, 강촌 아파트 등에서 살고 있다.
일본인들이 이곳을 선호하는 이유는 생활에 불편하지 않기 때문. 조흥은행 이촌동지점은 작년 3월부터 일본인전용 특별창구를 운영하고 있고, 유치원을 비롯해 미용실, 병원, 이발소 등 편의시설엔 모두 일본어가 한국어처럼 쓰인다.
일본식품전문점 ‘모노마트’ 뿐만 아니라 한강쇼핑센터와 삼익상가 등에선 일본산상품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미타니 우동’은 일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다. 정통 일본맛을 자랑하는 일식점들도 많다.
일본인 주부들에게 이곳은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편리하기 때문인데, 가족과 함께 온 일본인 가족은 무조건 ‘이촌동행’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수원에 직장이 있는 스가와라 류지(菅原龍二ㆍ40)도 아내 때문에 이곳에 정착한 경우다.
보통 주부인 모리시마 나오코(森島直子ㆍ35ㆍ여)는 “무엇보다도 이웃들이 일본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이촌동 고향론’을 피력했다.
그들은 한국인 이웃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일본인들의 생활속에 배어있는 예의와 합리성을 직접 겪은 이촌동 주민들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닌 ‘가깝고도 가까운’나라일 뿐이다.
신동아 아파트에서 12년동안 경비원으로 일해온 장판용(59)씨는 “분리수거를 할때 그 깔끔함에 놀란다”며 “하루 10번을 만나도 꼬박꼬박 인사하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조흥은행 김덕수(40)과장은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 일본인들이라 붐비는 시간대엔 전용창구로 가지않고 일반인들과 똑같이 번호표를 뽑아 기다린다”고 생활태도를 전했다.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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