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집권당 대선후보 결정 전 총재직 사퇴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 정치의 새로운 실험이다.이 실험이 성공하면 우리정치는 한 단계 성숙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도로아미 타불' 이라는 소리를 또다시 들어야 한다.
결단을 내린 김 대통령에게는 일종의 도박일 수도 있다.
김 대통령이 공세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닌데다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최고 결정권자가 수세적으로 내린 결단이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정치 발전에 기여한 경우가 많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6월 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는 권리를 국민에게 되돌려 주었다.
노태우(盧泰盧) 전 대통령은 당시 민자당 후보였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에게 떠밀려 선거관리 중립내각을 출범시켜, 형식적이나마 공정한 대선관리를 시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비자금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전직 대통령 2명을 구속했고 성공한 쿠데타도 법으로 처벌받는다는 선례를 남겼다.
김대중 대통령도 재ㆍ보선에서 확인된 민심이반과 통제 불능상태에 빠진 민주당의 쇄신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고심 끝에 총재직 사퇴를 결심했다.
김 대통령이 어떤 상황에서 총재직 사퇴를 결정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총재직 사퇴가 어떤 결실을 맺느냐이다.
총재직 사퇴라는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김 대통령의 초지일관한 의지와 실천이 가장 중요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김 대통령이 정당에 초연한 입장에서 국가경영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되풀이 강조하고 17일 제주방문 때 민주당경선에서 엄정중립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것은 일단 청신호다.
김 대통령은 엄정중립을 밝히는 장소로 육지에서 떨어진 제주도를 택하는 치밀함도 보여주었다.
김 대통령은 총재직 사퇴가 한 순간의 실수나 오판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역대 어느 야당보다 집권가능성이 높은 한나라당이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고 김 대통령의 언행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비토 그룹이 아직도 엄존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우리사회의 고질인 지역감정이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김 대통령 다음으로 주요한 당사자는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최고위원제를 축으로 도입한 당내 민주주의 실험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결과 못지 않게 절차가 중요한 민주주의에서 절차가 무시되는 주장이 분출했고 결과적으로 당이 무정부상태에 빠져 총재가 스스로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당은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 (특대위)를 구성, 과도기를 수습하면서 새 출발을 시도하고 있지만 결과는 미지수다.
민주당은 집권당 사상 가장 비세(非勢)에 몰려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민주당이 환골탈태해 총재직 사퇴의 의미를 뒷받침 해줄 수 있을지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한나라당은 김 대통령의 결단이 취지를 살릴 경우 최대의 수혜자가 된다. 우리 선거의 해묵은 과제인 공정성시비와 관권ㆍ금권 개입 논란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당이 여당과 똑 같은 조건에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우리 현실에서는 매우 어려운일이다.
한나라당이 총재직 사퇴를 인위적 정계개편 가능성과 연계해 공세를 취하려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나라당은 단순한 추측만을 가지고 총재직 사퇴를 흠집낼 필요가 없다.
총재직 사퇴가 위기국면 탈출과 정치권 새판짜기를 위한 술수(術數)임이 드러난다면 국민과 여론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이로 인한 반사이익은 한나라당에 돌아간다.
실험의 성공과 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그 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유가 어디 있든지간에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국가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 정치를 한 등급 끌어올릴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된다.
이 기회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당사자인 김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이병규 정치부장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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