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8월 미국에서 3년간 유학하고 좀 더 공부하려고 네덜란드에 갔다.그 때는 아직 뱃삯이 비행기 표보다 싸고 짐도 더 가지고 갈 수 있었던 터라 이태리 여객선을 탔다. 대서양을 항해한지 8일만에 중간 기착지인 네덜란드 블리싱겐이란 항구에 도착, 입국수속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두 줄이었는데, 비교적 빠른 속도로 수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내 차례가 되어서 문제가 생겼다.
입국검사관에게 여권을 내밀자 내가 섰던 줄은 정지하고 말았다. 엄연히 입국 비자를 받고 갔는데도 검사관은 여권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거의 모두 옮겨 적는 것이었다.
당시 내 여권은 비자발급 등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두툼한 뭉치 같았다.
그 때만 해도 우리 여권은 대부분 유효기간이 1년이어서 매년 영사관에 가서 1년씩 연장해야 했고, 다른 나라에 여행하려면 목적지 추가허가를 받아야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두 번 캐나다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 때마다 캐나다 입국비자, 미국 재입국 비자를 받아야 했다.
기간연장, 목적지 추가, 입국 비자 등으로 여권의 여백이 모자라 병풍같이 접은 종이를 여권에 끼워 붙여야 했다. 종이 질도 나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네덜란드 검사관은 그 많은 내용을 거의 복사하다시피 옮겨 쓰면서 온갖 질문을 다 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니까 혹시 자기 나라에 주저앉지나 않을까 걱정한 것 같다.
그 동안 내 뒤에 줄 섰던 사람은모두 다른 줄로 옮겨가서 심사를 받고 빠져나갔고 혼자만 남았다. 마침내 입국 허락을 받고 들어갔더니, 어떤 서양인이 다가와서 여권을 좀 보자고 했다.
"도대체 어떤 여권이기에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고.
1960년대에는 약소국민으로 설움을 받은 일이 무수하지만 그 때 만큼 뼈아프게 느낀 적은 없다.
기억력이 나빠서 수많은 사건을 잊어버렸지만 블리싱겐 항구에서 당한 그날의 수모는 잘 잊어지지 않는다.
요즘도 가끔 네덜란드에 갈 일이 있다. 비행장 입국 검사대에 한국 여권을 내밀면 별로 살피지도 않고 잘 통과시켜 준다. 격세지감이 든다.
역시 나라가 강해야 국민이 대접을 받고 어느 정도의 품위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다.
지금도 우리 나라를 약하게 만드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분노가 치밀고, 우리 나라를 조금이라도 강하게 만드는데 공헌하려고 나름대로 애쓴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가능한 한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손봉호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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