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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화어사전 / 찌그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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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화어사전 / 찌그러지다

입력
2001.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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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눌려서 모양이 고르지 않게 우그러지다■새 정의: 말 없이, 움직이지 않고, 불쌍한 표정으로 움츠려 있다

■용례: “저쪽 구석에 가서 찌그러져 있어.”

세상은 냉혹하다. 스타 하나가 마약과 남자 문제로 망가지자 그럴 줄 알았다고 손가락질을 해댄다. 그녀의 잘못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냉정한 세상은 그녀의 모든 것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복잡한 사생활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고, 이미지와 실체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고 욕을 한다.

그래서 세상은 그녀에게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것’을 명령한다.

눌려서 모양이 고르지 않게 우그러지는 상태. ‘찌그러지다’의 정의다.

찌그러진 냄비, 찌그러진 양철통처럼 주로 물건의 상태를 일컫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되기 시작하면, 그 내용은 그리 만만치 않게 된다.

‘찌그러지다’는 조직폭력배와 같이 위계서열이 분명한, 억압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곳에서 자주 쓰인다.

조직의 넘버 2가 넘버 3의 잘못을 질책한다. 그리고 한 마디. “너 저쪽 구석에 가서 찌그러져 있어.”

이 말을 듣는 순간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몸을 움츠리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찌그러진 냄비와 같은 비참한 모습이 된다.

학교에서도 ‘찌그러짐’과 관련된 표현을 들을 수 있다. 수업시간에 엎어져 자는 학생. 그는 찌그러져있는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 못해 외치는 선생님의 말은 강한 질책이다. “거기 찌그러져 있는 녀석, 일어나.”

핀잔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찌그러져 있어’라는 표현에는 상처를 입히는 비수가 들어있다.

동료들의 모임에서 튀는 모습으로 나서다 핀잔을 먹고 얼굴이 빨개지는 경험을 한 회사원 김모(25)씨.

“‘찌그러져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 주눅이 든다. 그리고 나서 기분이 나빠진다. 내가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스타였던 그녀는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하이에나의 속성처럼,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던 대중과 매체가 공격에 나섰다.

순간을 즐기기 위한 이야깃거리로 전락한 그의 사생활. 빌미 하나로 한 인간 자체를 짓밟는 세상이다.

어느 누구도 ‘찌그러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더 무서워진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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