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초기 정부부처 관계자 상당수가 UR이 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면? 또 UR 협상 정부대표단으로 파견된 공무원 일부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못했다면?믿기지 않지만 모두가 사실이다. UR의 참패는 당연한 결과였다.그로부터 15년이지난 2001년, 뉴라운드(도하 개발 아젠다)가 출범했고 이에 따라 국내 농업, 서비스시장의 개방 정도를 결정하는 3년간의 후속협상이 발등의 불이다.그러나 이 국가적 회담을 이끌어갈 정부내 통상전문가들이 여전히 부족하거나 전문성이 떨어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철새 전문가만양산
극단적인 경우지만뉴라운드 서비스산업(에너지부문) 주무부처인 산업자원부의 담당 공무원은 지난해에만 무려 4차례 교체됐다. 언제 바뀔 지 모르는데 골치 아픈 업무에신경이나 썼을 지 의문이다.
UR 당시 농업분야 협상을 맡았던 외교통상부 담당 과장과 직원은 현재 재외공관에 나가 있다. 그 사이 외교공무원 순환보직규정에 따라 각각 5차례와 4차례 인사이동이 있었고, 담당 직원은 서기관(4급)에서 사무관(5급)으로 직급이 낮아졌다.
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 성극제(成克濟)교수는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해 9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조선분야 협상대표로 한국을 방문한 살바도르살레르노 철강조선 과장은 산자부 이희범(李熙範) 차관이 91년 제네바에서 철강협상을 벌일 당시의 협상 파트너였다.
EU 집행위원회에서 20여년을철강과 조선 분야에만 근무한 그를 대적(對敵)할 우리 정부 협상대표의 그 분야 경력은 만 1년이었다. 통상협상력은 전문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감안하면시작부터가 불리한 게임이다.
■‘팩스’로이뤄지는 통상협상
뉴라운드의 후속협상은 내년부터 본격화하지만세계무역기구(WTO)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의 ‘전초전’은 훨씬 이전부터 달궈져 왔다. 당장 연말까지 한 달 남짓 동안 예정된 회의만도 30여건. 이 가운데에는 반덤핑 핵심 분야인 분쟁해결기구회의와각국 무역정책검토회의 등도 포함돼 있다.
회의 때마다 주제네바 대표부는 관련 서류를 팩스로 보내 산자부의 검토ㆍ자문을 구하기에 바쁘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후 정부기구의 일괄 감축 계획에 따라 기존의 제네바 상무관 2명(3급1명, 5급1명)을 전원 철수시킨 데 따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속협상주무대가 될 제네바에 반덤핑은 물론, 보조금, 섬유(이행), 서비스(유통ㆍ에너지) 투자ㆍ경쟁(검토의제) 등 굵직굵직한 현안을 전담할 전문가는 단 한명도 없는 셈이다.수산보조금 협상도 핫이슈이지만 해양수산부 주재관 역시 없다.
■외교부의 ‘섬’ 통상교섭본부
통상협상의 지휘부인외교통상교섭본부도 사정은 비슷하다. 얼마 전에 통상 전문인력으로 스카우트됐던 연구원 K모씨는 불과 1년도 안돼 뛰쳐나왔다. 그는 “나름대로는 역할을하고자 포부를 가지고 들어갔지만 주어지는 일은 연설문 작성이나 외국 문건 번역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를 키우지 못하는 데는 외교부의 안보(정무)외교텃세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지난 98년 통상교섭본부 출범 당시 각 부처에서 선발된 통상 전문인력 43명 가운데 현재 본부에 남은 사람은 고작9명. 산자부 출신은 총 32명 가운데 5명 만이 본부에 남았을 뿐 나머지는 재외공관 근무(12명)나 연수ㆍ휴직(7명), 전출ㆍ퇴직(8명)으로자리를 떴다.
서울대 국제지역원 박태호(朴泰鎬) 교수는 “핵심 요직은 옛 외무부 사람들이 독점하고, 외부 출신 전문가들을 중용하지 않는 외교부풍토가 존재하는 한 통상 전문가가 뿌리를 내리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전략ㆍ지침이협상력이다
협상 전문가만 없는 것이 아니다.경희대 성교수는 “농업분야의 경우 협상력이 없는 것은 협상전략이 너무 경직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만나타협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는 협상장에 가서 아무 것도 주지 말고, 듣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 그간 국회와 이익집단의 눈치만 살펴 온 정부의 협상전략이었다는 것이다. 협상에 성공하려면 좋은 전략과 논리, 대안을 가지고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국제 통상문제의 싱크탱크로 통하는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무역투자정책실 12명과 지역연구센터 15명 등 불과 27명의 박사들로 한국과 전 세계를 포괄하는 통상 및 지역연구를도맡고 있다.
국제 통상환경도 경쟁 투자 등 분야ㆍ업종별로 전문화하고 있지만 정부 지침에 묶여 충원과 조직확대는 엄두도 못내고 오히려 인력이 학교나기업체 등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민정부가 중ㆍ장기 통상 전선의 신병훈련소로 육성한다며 97년 이후 760억원을 투입했던 ‘국제대학원’은출범 5년째인 올해 상당수 대학이 정원도 못 채우고 있다.
■협상 이제시작인데
내년부터 본격화하는후속협상은 도하 각료회의와 달리 양자협상이 줄을 잇게 된다. 각료회의는 팀플레이 성격이 강해 우리가 놓친 것을 ‘동조국가(friendsgroup)’가 채워주는 경우도 있지만 이제는 국가별 품목별 시장개방 이행계획서(Country List) 작성을 위한 통상 당사국간 줄다리기가중심이 되는 만큼 협상 실패는 국내 산업 피해로 직결된다.
정부와 국회가 정신을 차려야 할 때이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선거 등을 의식한 땜질식뉴라운드 전략은 결국 국민과 국가 경제의 짐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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