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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1.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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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여름방학때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습니다. 대학을 포기했었냐고요? 그렇지는 않습니다.지금이나 그 때나 정기적으로 코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가야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오는 일종의 방랑벽이 있었나 봅니다.

부모님께 빌고 빌어겨우 2박 3일을 허락받아 찾은 곳은 원산도라는 서해안의 섬이었습니다. 지금은 충남 보령시에 속해 있죠.

섬으로 행선지를 잡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루 한두 차례 손바닥만한 똑딱선이 왕복했던 그 곳은 파도가 조금이라도 성을 내면 교통편이 완전히 끊깁니다.

자동으로 여행 일정이 길어지게 되는 거죠. 우리 모두 그것을 노렸던 것입니다.

희망과는 달리 이틀간 햇살이 부서지는 최고의 날씨가 계속됐습니다. 하늘을 원망했죠.

‘기우제라도 지내볼까?’ 웃지 못할 제안도 나왔습니다. 바닷가였지만 ‘고3’이라는 무게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어오기는 커녕 가슴만 점점 답답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이 두 가지 우울함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서 말입니다. 긴급 뉴스였습니다. “과외 전면 금지, 본고사폐지, 대학정원 두 배로 확대….”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부의 새로운 대학입시 정책이었습니다.

나라 돌아가는 일이야 안중에 두지도 않았던 철없는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흥분했습니다.당연히 본고사 폐지와 대학정원 확대죠.

특별한 소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겠지만 고만고만한 우리에게는 하늘이 열리는 소리였습니다.

모두 달려가 섬에 한 대밖에 없는 이장댁 전화기를 붙잡았습니다. 부모님께 3일을 더 허락받았죠. 이후 제발 비가 오지 말라고 기도했습니다.

풍광도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원산도는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시험과 여행이라는 극과 극이 뒤섞인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억압 속에서 어떡해서든 한 줌의 자유라도 누리고 싶어했던 치기 어린 기억이기도 합니다.

2002학년도 수능시험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지난 해와 달리 무척 어렵게 출제돼 수험생들의 마음은 아직도 천근만근인 모양입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널뛰는 입시정책 때문에 수험생들은 보너스 고통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렇지않았다면 ‘자유로의 여행’을 위해 벌써 보따리를 쌌을 것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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