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9 to 5’의 운명.
여덟 시간의 업무는 그들에게 스트레스라는 부산물을 잔뜩 남겨 놓는다.
오후 5시. 희망의 시간. 거꾸로 ‘5 to 9’는 나만의 것, 우리의 것이다.
직장 상사의 호령도, 눈치 볼 일도 없다. 날 이해하고 알아주는 가족과 친구와 애인이 있고, 나만의 장소와 자유가 있다.
직장인을 중심으로 한 ‘밤 문화 동호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에게 밤은 소비와 소모의 시간이 아니다. 활력을 위한 재생산의 시간이자 날 위한 투자의 시간이다.
■오후 7시 30분, 서울 양재동 재즈댄스 연습실
매주 화, 목요일 오후 7시면 서울 양재동 한전 아츠풀센터 연습실에 재즈댄스 동호회 ‘찬영이와 재즈재즈’ 회원들이 모여든다.
50명의 동호회원중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은 15명 정도.
회원들이 웬만큼 모이자 바닥에 앉아 가벼운 음악에 맞춰 몸을 푼다. 30분 간의 몸풀기가 끝나고 투야의 ‘I Do’라는 노래가 흘러나오자 분위기는 일변한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허리를 제끼고, 다시 어깨와 손목을 부드럽게 한 번, 격렬히 두 번흔든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다.
초등학교 교사 김문진(31ㆍ여)씨. “다른 생각이 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재즈댄스다. 1998년 시작할 때는 살이 4㎏ 정도 빠지는 재미가 있었고, 이제는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는 느낌이다. 마흔 살이 되면 동료들과 함께 중년을 위한 재즈댄스강의를 할 생각이다.”
이 동호회에는 물론 남자 회원도 있다. 제일제당에 근무하는 민철환(32)씨와 대한항공 부기장인 장현귀(36)씨도 재즈댄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이들은 “몸과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 버리는 희열이 있다”며 재즈댄스를 예찬했다.
■오후 10시, 라틴바 마콘도
10일 오후 10시 서울 홍익대 앞 라틴바 마콘도. 어두운 조명 아래 벽 쪽에만 테이블이 놓여 있다. 홀 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빠른 라틴음악이 흘러 나오자 사람들이 짝을 지어 일어선다.
손을 마주잡고 두 박자 라틴댄스 메렝게를 추기 시작한다. 무릎을 살짝 굽히면서 양 발을 번갈아 바닥에서 살짝 띄웠다 댔다 하는 모습이 흥을 돋운다.
음악이 네 박자 살사로 바뀐다. 라틴댄스 동호회 ‘러브 라틴’ 회원 현채(23)씨가 파트너의 손을 끌어당겨 몸을 돌려준다.
박자가 격렬해지는 만큼 동작이 커지고 곳곳에서 감탄의 박수가 터져 나온다.
회사원인 현씨가 라틴댄스를 처음 접한 것은 2개월 전. 이제는 매주 수요일 역삼동 라틴바에서 정기모임을 갖고 토요일이면 홍익대 앞 라틴바를 다니며 춤 실력을 키우고 있다.
‘비바 살사’ 동호회 회원인 회사원 강태안(34ㆍ여)씨는 “기성세대의 밤문화와 땀을 흘리며 라틴댄스를 추는 문화는 완전히 다르다. 춤이라는 목적 하나로 서로를 위하는 정신이 댄스동호회의 새로운 문화창출력”이라고 설명했다.
■오전 1시, 힙합바 N.B
번쩍거리는 조명, 귀청이 찢어질 듯한 힙합 음악에 맞춰 열정적으로 몸을 흔드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홍익대 앞 힙합바 N.B. 오전 1시가 넘었지만 대학생들 사이에서 정열적인 춤실력을 발휘하는 나이 든 얼굴이 눈에 띈다.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김영천(32)씨. 그는 매주 주말이면 온 몸을 내던져 음악과 춤에 빠지는 사람이다.
김씨는 “힙합의 매력은 몸을 부러뜨리는 듯한 동작의 강렬함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신촌에 있는 한 학원에 다니면서 기초동작을 배운 뒤 실전에 뛰어들어 몸으로 부딪히며 힙합을 배운 지 7개월이 넘었다.
일반적인 댄스동호회는 주로 인터넷이나 문화센터를 통해 만들어진다. 인터넷 회원 가입은 무료. 직장인 회원이 많아 대부분의 정기 강습과 모임이 밤 시간에 이뤄진다.
물론 학원에 다니면서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댄스학원XN 관계자는 “재즈, 라틴, 힙합, 나이트댄스 등 갖가지 춤 강의를 개설해 직장인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다양하게 수업을 한다”고 말했다.
춤을 즐기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춤을 통해 일상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그래서 오늘 밤 ‘5 to 9’의 한 바탕 춤사위를 끝내면, 내일 아침 새로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밤을 잊은 댄스 동호회원들이 느끼는 춤의 매력이다.
밤은 날 위한 투자의 시간. ‘9 to 5’의 업무 중압감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재즈댄스 동호회 ‘찬영이와 재즈재즈’ 회원들의 밤모임.
정상원기자
orno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