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11에서 두 달이 겨우 지나가는데 다시 뉴욕에 여객기 추락의 비극이 되풀이 됐다.밤새 TV뉴스를 지켜 보면서,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보았던 '9ㆍ11을 보도한 세계 신문들의 1면'을 떠올렸다.
말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어 보이는 충격적인 사태를 세계의 신문들이 어떤 단어로 전달하고 있었는지 살펴 보는 것은 단순히 신문 종사자의 호기심이나 관심만은 아니다.
사진 한 장만으로 1면을 채우고 제목은 달지않아 그야말로 '언어(言語)를 절(絶)한' 비극을 보여준 신문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미국 신문들은 주먹만한 활자로 비명(悲鳴)에 가까운 외마디 소리를 질러댔다.
설명이 아닌 고함(高喊)이고, 터져나오는 호곡(號哭)이다.
이를테면 '악(惡)'에 해당하는 단어 'EVIL', '피격'이라고 할 'ATTACK', '공포(Horror)', '테러(Terror)', '경악(Terrifying)', '극악한 짓(Outrage)', '상상도 못할 일(Unthinkable)' 따위 단어 하나로 된 제목들이 경연을 하고 있다.
사건 내용을 여러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충격이 너무나 크고 직접적인 것이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충격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외마디 내지르기 식의 선정성(煽情性)을 거부한 신문들도 눈에 띈다.
두 줄 짜리 긴 제목 문장으로 사건 내용을 설명한 월 스트리트 저널과 유럽의 이른바 권위지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그리 크지 않은 활자로, 더러는 1면에 사진을 쓰지 않는다는 전통을 지키면서 9ㆍ11이라는 엄청난 사태에 침착한 대응 자세를 보였다. 8일 임기 1년4개월을 남긴 김대중 대통령이 후계자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 총재직의 사퇴를 전격 선언한 것은, 그것이 우리 정치사에서 일찍이 없던 일이고, 그만큼 놀라운 일이어서, 특히 그동안 당총재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지 못해 조바심해왔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민주당으로서는 곤혹과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비교할 성격은 전혀 아니지만, 일부 당원들에게는 당 총재직의 사퇴가 '상상도 못할 일(Unthinkable)'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따라서 사퇴의 말씀을 전해 들으면서 비탄의 눈물을 참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충격과 비탄은 더 이상 그럴 때가 아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은 ‘사퇴 이후’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골똘히 주시하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고 외마디 소리로 반응하는 단계가 아니라 차분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알맹이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 변화의 몫은 전적으로 당의 자율(自律)에 맡겨졌다.
9ㆍ11 테러에 이어 성과없어 보이는 전쟁에 내몰린 미국의 문제는, 9ㆍ11이 던진 함의(含意)에 대해 자성(自省)을 거부한 데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 역시 비교할 일은 전혀 아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당총재직의 사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실패를 솔직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인정했다는 점이 평가를 받을 만 하다.
그는 “브루나이에서도 회의도중에 생각나는 게 국내문제였다. 이렇게 가다가는 당의 일도 안되고 국사도 잘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총재직 버리기를 결단한 과정을 술회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당을 버림으로써 당의 앞길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그러나 그로써 그가 그의 막중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는 더 큰, 무한대의 책무에 여전히 눌려있다.
그가 진 빚은 그가 끝내 벗어버리지 못한 ‘1인보스 정당 체제’, 그것이다.
우리 정치, 우리 사회의 만악(萬惡)은 권위적 정당구조, 정당운영의 사당화(私黨化)에 그 뿌리의 한 가닥을 박고 있다.
민주당의 진정한 ‘민주화’로 우리 국민이 못다한 정치개혁의 꿈을 이루는데 ‘평당원’인 그도 도와야 한다.
/ 칼럼니스트 assisi6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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