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11 테러 참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계속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세계는 심각한 의문에 휩싸여 있다.21세기 벽두에 일어난 이 끔찍한 사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증오로 얼룩진 테러집단의 광기라고 보고 말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오만방자한 대외정책이 달라지면 그런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나왔다. 세계적인 학자ㆍ문인 19인으로 구성된 ‘명사(名士)그룹’은 최근 코피 아난 사무총장을 통해 유엔에 ‘분열을 넘어’(Crossing the Divide)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책자는 이번 테러 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갈등과 불화와 전쟁으로 얼룩진 지난 세기 인류의 모습을 되돌아 보면서 21세기 지구촌의 미래를 설계한다.
그리고 그 답으로 ‘문명간 대화’를 촉구한다. 이는 단순명쾌한 답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겠지만 평화와 공존으로 가기 위한 국제관계의 새 틀을 모색하는 지성적ㆍ문화적 대안으로 읽힌다.
유엔이 요약ㆍ발표한 내용을 보자.
“지금 두 대립적 경향, 즉 세계화와 다양성은 우리 현실의 두 얼굴이다. 인종청소, 무력분규, 이른 바 종교적 충돌 등은 하나같이 다양성이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는 생각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최근 10년 간 (지구촌의 각종) 참사를 돌이켜볼 때 ‘왜 지금 대화가 필요하냐’는 질문은 자명하다. 대화 없는 세계화는 헤게모니(독점적 지배)의 개연성을 증폭시키고, 대화 없는 다양성은 (타자에 대한) 배제를 더더욱 촉발할 수 있다. 따라서 다양성을 위협이라고 보는 사람들과 다양성을 개선과 성장의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에 대화는 본질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다양성을 위협으로 생각하는 것에 근거한 (타자) 배제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개선과 성장의 요소로 생각하는 포용의 패러다임으로 옮아갈 수는 없을까?”
이러한 문제 제기는 냉전 종식 이후 테러리즘이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21세기 세계질서의 재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매달리는 ‘현실적’ 국제정치 논의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명사그룹’은 3년 전 유엔이 2001년을 ‘문명간 대화의 해’로 지정한 뒤 위촉을 받아 작년 8월 발족했다.
면면을 보면 아흐메드 카말 아불마그드 이집트 카이로대 법학 교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딘 고디머,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신학ㆍ철학자 한스 큉, 중국 출신의 두웨이밍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장,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 등 여러 문화권을 망라한 쟁쟁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한 ‘지혜’는 아프간의 포성에 묻혀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명사그룹의 일원인 세르게이 카피차 러시아 모스크바 물리학ㆍ기술연구소 교수는 “책으로 역사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분명 비극적인 9ㆍ11 사태와 관련해 반성하고 성찰하도록 이끄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바드 자리프 이란 테헤란대 국제법 교수는 “테러리즘이 더 이상 번성할 수 없는, 증오와 인종청소와 대립이 없는 패러다임을 촉진하기 위해 이슈별 연대ㆍ협력과 같은 새로운 요소들을 찾아내야 하고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영어로 작성된 이 책자는 곧 각국 언어로 번역ㆍ출판된다.
/이광일기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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