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충무로 대자본과 만난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은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실마리를 푸는 데 신경을 집중시키기 보다는 비극적 운명의 수렁에 빠진 인간의 관계에더 초점을 맞췄다.한강에 떠오른 한 구의 시체, 양달수 살해사건을 추적하는 오형사(이정재)는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면서 우리 현대사의 상처와 맞닥뜨린다.
그의 손에 들어온 손지혜의 일기장은 한국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좌우익 포로의 대립과 비극을 잉태하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술회한다.
처형된 남로당 당원의 딸 손지혜(이미연)는 스파이 ‘흑수선’으로 활동하면서 수용소 좌익 포로의 탈출을 돕는다.
곁에는 그녀를 지키는 것을 존재 의미로 아는 황석(안성기)이 있지만, 불행을 재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남한 경찰과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힌 좌익 포로들에 의해 두 사람은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흑수선’은 장르영화의 특성과 감독이 이전에 추구했던 작가주의 영화에 한 자락씩을 걸치고 있다.
때문에 모든 주제를 코믹 버전으로만 만들어내는 요즘 영화가 감히 엄두내지 못한 심도 있는 시선으로 역사와 영화를 조망한다.
사실적인 포로 수용소, 대나무 숲에서의 추격신 등은 스케일 큰화면을 능란하게 요리하는 배창호 감독의 관록이 느껴진다.
그러나 ‘난제’를 풀어가는 영화의 최종적인 숙제는 상생하기 어려운 두 특성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것.
‘흑수선’은 과거지향적 상업영화의 잔재가 모호한 작가주의적 지향과 불협화음을 빚고 있다.
액션과 미스터리를 비교적 무거운 주제와 결합한 영화는 감독의 말을 빌자면 ‘스타일’을 이루고는 있다. 정서를 중시하는 ‘배창호영화적’이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이미연 정준호 이정재 등 젊은 배우의 연기에 제대로 투사되지못했고, 액션 장면에서 조차 역동감 보다는 느슨한 풍경을 연출한다.
오형사가 일본인 사업가 마에다 신타로로 변신한 한동주(정준호)를 추적하고, 손지혜의 비밀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조차 관객을 깊숙이 빨아들이지 못한다.
감독의 분명한 저력이 표면으로는 부상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평가에 회의적인 또 다른 이유는 이 영화가 부산영화제 개막작이었다는 데도 있다. 순제작비 43억원의 블록버스터가 아시아 영화의 산실을 지향하는 영화제 정신을 담았는가 하는 의문이다.
‘개막작은 한국영화이어야 한다’는 영화제측의 강박이 외려 ‘흑수선’에 대한 평가 절하를 유도한 셈이다. 16일 국내개봉.
/박은주기자jupe@hk.co.kr
■황석役 안성기
평론가들은 세월에 비례해 숙련해가는 그의 연기력을, 제작자라면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배우라면 드러나거나 숨을 때를 아는 노련함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선뜻한국 영화계의 소중한 인물로 꼽는 안성기. ‘흑수선’에서도 그는 그 자리를 잃지 않았다.
20대 황석은 얼굴에 주름이 보이지만, 그는 맑은 청년의 이미지로 관객을 맞이한다.
“정준호나 이미연은 어떻게 나이 들어 보일까 걱정했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주사를 맞고 얼굴을 펴볼까 생각도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웃음). 황석은 캐릭터만으로 매우 파워풀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기에 다행이었다.”
위태로운 이미연의 연기(기진맥진해있다 산머루즙 두 방울에 생생한 얼굴로 “오빠 저 꽃 좀 봐”하는 식)처럼 영화적 단점이 드러날 때쯤이면 그는 어김없이 영화를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등장인물을 통해 영화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이 배 감독의 특징”이라는 안성기는 말없이 손지혜를 지키는 황석 그 자체로 절대 사랑에 대한 배창호 감독의 믿음을 구현했다.
“배 감독 영화는 늘 따뜻하다. 악인에게도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오랜만에 새 장르의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는 속도에 리듬이 있고 진지하다.”
‘천국의 계단’이후 꼭 10년 만에 만난 영화 친구인 두 사람. 안성기의 바람은 “같이 만들고, 같이 죽어갈 친구로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부산=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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