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기업들중 투기등급 판정을 받은 기업들이 1997년말 외환위기 이후 최고수준을 보이고 있다. 경기침체 장기화로기업실적이 악화하면서 지난 7월 이후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기업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하향조정한데 따른 것이다.한 기업의 주가가 미래 수익성을 평가하는 잣대라면, 신용등급은 단기 수익 및 현금흐름을 감안해 채무 상환능력을 평가하는 것.투기채 비율이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라는 것은 결국 기업의 펀더멘털(기초 체력)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경기가 조기 회복되지 않을 경우 신용등급 하락이 최근의 자금시장 경색조짐(유동성은 풍부하되 극도의 위험기피 심리로돈이 기업으로 돌지 않는 현상)과 맞물리면서 신용 대란이 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급등세로 돌아선 투기채 비율
투기등급을 받은 기업의 비율(한국기업평가 기준)은 97년말 44.8%에 달했으나, 이후 98년말 30.8%, 99년말37.5%, 2000년말 35.8%로 점차 낮아졌다. 그러나 올들어 경기침체가 장기화하고, 하반기 들어 대외 경제여건이 급속히 악화하면서 지난달말기준으로 39.3%로 급등했다.
한기평의 경우 올 1~6월에는 신용등급 상향업체가 하향업체의 2배에 달했으나 7월이후 상향 29개, 하향 38개로 하향업체가월등히 많다. 특히 올들어 신용등급이 떨어진 4개업체중 1개는 투자적격등급에서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소위 ‘추락천사(Fallen Angel)’였다.
신용등급 하향 움직임은 신용평가업계 2,3위인 한국신용평가, 한국신용정보 등도 비슷하다.
올 1ㆍ4 분기 신용평가 3개사가 등급을 상향한 업체수(중복평가 합산)는 23개, 하향한 업체는 18개, 또 2ㆍ4분기에는각각 81개, 27개로 상향업체수가 많았다. 그러나 7~10월에는 상향 81개, 하향 98개로 하향업체가 급격히 늘고 있는 실정이다.
■신용등급 하향조정 배경
신용등급은 기업이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발행하고자 할 때 신용평가회사들로부터 받는 등급이다. ‘빚쟁이’가받을 돈을 기업이 무리 없이 지불할 수 있는 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용등급 하향업체수의 급증은 그만큼 기업들의 현금흐름이 악화, 신용위험(부도 리스크)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한국신용평가김선대 상무는 “경기 침체로 해당 기업의 영업상황이 악화됐음을 반영했다”고말했다.
한국기업평가 윤우영 평가기획팀장도 “하반기 하향업체가많은 것은 우량업체일수록 상반기에 미리 평가를 받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일부 기업의 경우 당분간 수익 및 현금흐름이개선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용등급이 떨어진 업체들은 그만큼 회사채발행 성사가능성이 줄어들고, 발행에 성공하더라고 금융비용을 추가적으로 물어야 한다. 이미 발행된 회사채는 금융기관이 편입을 기피, 유통이 안된다.
■신용대란 조짐인가
투자적격인 BBB등급도 극히 일부만 유통되는 실정이지만, 정부가 프라이머리 CBO 등을 통해 부족한 신용을 보강하기로 한이상, 현재 자금시장 불안이 당장 경색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낮다. 또 한계 기업들을 중심으로 신용등급이 급강하하고 있지만, 예상대로 내년2ㆍ4분기 이후 경기가 회복된다면 설령 이들 기업이 무너지더라도 그 파급은 미미할 것이다.
그러나 내년초에도 경기전망이 계속 불투명하면 우리나라는 신용공황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기평 관계자는“경기가 살아난다는 확신이 없으면 내년초 정기평가에서 신용등급 하락은 봇물을 이룰 것”이라며 “최근신용등급 하락은 그 경고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금리를 더 얹어줘도 회사채 유통이안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신속인수와 프라이머리 CBO에 편입됐던 악성 투기채들의 만기가 대거 도래하는 내년초에는 정부의 보증여력도 한계에 봉착할수 있다. 불황에 따른 기업 펀더멘털 악화와 자금시장의 가격기능 마비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흑자도산을 포함, 신용대란이 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권경업 대투 채권운용본부장은 “외환위기때의 신용대란은 고금리에다 금융기관의 건전성 강화로 인한 일시적인 미스매치(만기불일치) 성격이 강했다“며 ”그러나 앞으로 닥칠 수 있는 신용대란은 보다 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신용공황 수준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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