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11 테러사태가 발발한 지 꼭 두 달이 되었다.이 사태의 여파로 지구촌의 정치경제가 썰렁해졌다. 우리나라에도 겨울이 온 것이다.
다시 봄이 오가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고, 그럴수록 이 아메리카 발 냉기류가 매섭게 느껴진다.
이 사건 직후 신문을 통해서 보도된 한 장의 사진은 인상적이었다.
그 사진은 미세 잔해로 뒤범벅된 뉴욕 시민들이 공포에 마비된 몸을 이끌고 현장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 사진에 찍힌 회색의 침묵은 경악을 넘어선 체념을, 질문을 단념한 의문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예술가도 연출하기 힘든 심리적 혹한의 장면일 것이다. 바로 거기에 언어를 넘어선 21세기의 묵시록이 극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당시 독일의 유명 작곡가 슈톡하우젠은 그 테러공격을 '이제까지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라 해서 물의를 빚었다.
그 공격이 '음악에서는 결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단 한 순간에 이뤄낸 것'이라 평한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분노했고 비난했다. 그의 작품을 위한 공연은 취소됐고 후원자들은 등을 돌렸다.
그토록 많은 희생자들을 낸 폭력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당연히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나는 이 작곡가의 망언을 전해듣고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생각했다. 근대미학의 초석을 놓은 이 책에는 네로가 등장한다.
네로, 그는 시를 짓기 위해서 로마를 불태운 황제이다. 어떻게 시 몇 줄 때문에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광기였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들은 조금씩 그런 광기를 지니고 있을 법하다.
심미적 가치에 미쳐서 다른 모든 가치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예술가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세속적 이익이나 권력에도, 어떨 때는 가족에도,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에도 무관심해야 겨우 명작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미적 완성을 위해서라면 악마와 손잡는 것도 개의치 않는 것이 예술가인지 모른다. 칸트는 이것을 무관심의 원칙이라 불렀고, 폭군 네로를 끌어들여서 설명했다.
그 원칙은 예술적 사유가 미적 가치 이외의 모든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함을 말한다.
예술적 판단에서는 예술 외적 가치는 모두 보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철저히 따르는 예술가들은 탐미주의자라 불린다.
탐미주의자는 미추의 문제를 이론적 진위의 문제는 물론 실천적 선악의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한다. 아름다움의 세계에 탐닉한 채 세상을 잊고 살기로 한 것이다. 슈톡하우젠은 그런 탐미주의자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탐미주의는 칸트를 따르되 충분히 따라가지 않고 있다. 이 철학자는 마침내 예술적 미를 도덕적 선의 상징으로 보았다.
도덕성을 생각하도록 자극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도덕적 상식이나 당파적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적 미가 상징하는 것은 이미 언명하거나 계산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아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다만 끊임없이 우리의 사유를 촉발하는 것, 따라서 초월적인 것이다.
그 초월적인 것을 암시하거나 환기 할 수 있는 것이 예술뿐이라는 것이다.
9ㆍ11 테러사태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사건일 수 있다. 거기서 폭발한 것은 현행의 질서에 잠재하던 모순들이다.
그 폭발의 현장에서는 분명 어떤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 목소리는 인류가 아직 충분히 생각지 못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해야만 할 어떤 것, 하지만 이제까지의 산술로는 명확하게 포착할수 없는 어떤 도덕적 진리가 있음을 외치고 있다.
그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 있은 후에야 지구촌은 평화의 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그 테러사태는 철학적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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