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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터뷰 / 윌프레드 호리에 前제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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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터뷰 / 윌프레드 호리에 前제일은행장

입력
2001.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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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사퇴한 윌프레드 호리에 전 제일은행장을 만났다. 작년 3월 갓 부임한 그를 만나 인터뷰기사를 쓴 지 1년8개월 만이다.인수인계 때문에 여전히 바쁜 그에게 짬을 내달라고 부탁한 건 느닷없는 사퇴이유를 알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내 은행 경영을 맡아 2년 가까이 우리나라 경제현장을 지켜본 그가 지금 우리 경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해서였다.

IMF사태 이후외국의 수많은 경제학자와 경영컨설턴트, 기업인들이 우리 경제를 진단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우리 기업인과 금융인, 정책결정권자들을 만나온 그의 현상파악과 진단이 실제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대담:정숭호 편집국 부국장

_최초의 외국인 은행장으로서 한국과 한국경제에 대해어떤 인상을 갖고 떠나나.

“아직 변해야 할 게 많다.우선 기업에 대해 이야기하자.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격차가 있는것 같았다. 대기업은 조직이 경직적이어서 변화에 더딘 데 반해 중소기업은 훨씬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고, 이를 근거로 의사결정을 하기까지 아주 유연한 편이었다.

다만 중소기업의 경우 어느 단계에 이르면 고급인력이 필요한데 이는 정부가 도와야 한다. 미국에는 중소기업의 경영을 돕기 위한 각종 자문협회가 있다.

은퇴자들의 자원봉사단체인 이협회는 중소기업의 자문에 응하는데 한국에서도 전문기술이나 지식이 있는 명예퇴직자들을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돼야 할 것이다.”

_한국의 대기업이 아직도 경직되어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언가.

“평생직장이라는개념이 문제인 것 같다. 미국 기업인들 사이에 ‘미국기업은 아래층부터 불이 꺼지고, 아시아 기업은 윗층부터 불이 꺼진다’는 조크가 있는데이 말은 아시아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미국의 최고경영자보다 일을 덜 하고 더 일찍 퇴근한다는 말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고경영자는 종업원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지므로 더 일을 해야 하는데도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급직원일 때는 열심이다가 부장쯤만 되면 일에서 손을 놓는다.직장은 안정됐으니 적당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_IMF사태로 많은 기업이 연공서열제를 철폐하지 않았는가?

“아직도 실질적인 연공서열제가 유지하는 기업이 많다. 연공서열을아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혁신적 사고를 갖고변화를 이끌어 나가며변화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많아야 한다.

여성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도 그 하나다. 여성들은 헤어스타일, 의상, 화장 등을수시로 바꾸고 있어 변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는 반면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변화에 소극적이다.

나만 해도 머리 가르마를 바꾸는 데 40년 이상 걸렸다. 같은 모양의 양복에 매일 와이셔츠 넥타이를 매야 하는 남성보다 여성들이 변화를 앞장서 불러올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 지난해 그는 대졸신입행원의 70% 가까이를 여성으로 채용했다. 또 지점장 등 부서장급 이상 여성도 3명에서 10명으로 늘렸다.)

_최고경영자의 변화, 퇴직인력 활용, 여성인력 확대 같은 방안만으로 한국경제가 밝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이다. 한국인의 근면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은 한국경제의 앞날에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규제가 더욱 완화되어야 하며, 앞으로 누가 정권을 잡는가에 관계없이 정치가 안정돼 꾸준히 시행될 확고한 비전이 필요하다.

_외국 기업인이 한국정치에 대해 언급한 건 드문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예측가능한 경제를 위해서 정치안정이 중요하다는 걸 말한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보다는 많이 개선됐지만 정치불안으로 외국투자자들이 한국시장을 불안하게 보고 있는 건 사실이다.

대만만 하더라도 주식시장이 안정적이며, 경제를 시장에 맡기고 있어 투자자들의 우려가 한국보다 훨씬 덜 하다.

이 모든 게 한국에서는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공적자금과 관련해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갔을 때 이야기도 했는데 월급이 얼마냐는 똑 같은 질문을 여러 의원이 되풀이하던 것이나, 여당의원이 질문하면 야당의원이 자리를 모두 비우고, 야당의원이 질문하면 여당의원이 자리를 비우는 행태는 증인에 대한 모독이자 귀중한 시간낭비로 다른 OECD국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라고 개탄했다.

_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 있다고 보는가.

“기업경영에 대한 신뢰 구축, 정부의 규제완화 등이다. 특히 금융에 대해서는 정부는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 등 안전성등만 감독하고 나머지 경영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자율을 확보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영 전반의 세밀한부분까지 간여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질 우려가 있다.”

_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이 심하다고 했는데 예를 들 수 있는가.

“예를 들 것도 없다. 우리 은행에 규제와 간섭을 한걸로 보아 일반 기업은 더 심한 규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관리들에게 이런 규제에 대해 항의라도 하면 ‘여긴한국이다. 한국식을 따르라’고만 한다. 말로는 세계화니 글로벌 스탠더드라면서말이 막히면 한국식을 주장하니 답답할 때가 많았다.”

그는 또 한국기업의 발전, 나아가 한국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유와 경영을분리하여 자본은 이사회를 지배하고, 경영자는 경영을 책임지게 하는지배구조의 변화는 경영자로 하여금 더욱 경영에 책임을 지게 한다.

얼마 전 미국 포드자동차가 창업자 가족을 다시 최고경영자로 선임했는데 나는 이게 잘 된 결정이라고 보지 않는다. 포드는1950년대에 창업자인 헨리 포드 1세가 경영하다 부도 일보 전까지 간 적이 있다.

그 뒤 국방장관을 지냈던 맥나마라가 경영을 맡아 겨우 회생했는데 지금 다시 창업자의 후손이 최고경영자가 된 게 과연 바람직한가 하고 생각한다.

제일은행도 내가 행장으로 있으면서 당국의 간섭을 받긴 했지만 우리의 모든 결정이 나의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라 이사회를 통해 투명하게 결정된 것임이 알려진 후부터는 간섭의 정도가 약해졌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바로 이런 장점이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거침없이 이야기 해온 그는 이 인터뷰가 언제 나오느냐, 너무 비판적으로만 말했는데 한국을 떠날 11월 말이후에 써줄 수 없느냐고 말했다. 물론 웃으면서.)”

_한국 기업 중 당신이 말한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곳을 말할 수 있는가.

“두산의 경영이 인상적이었다. 두산의 경영자들은 구조조정을 위해 모든 전략에 변화를 꾀했으며, 경영을 즐기는 것 같았다. 소비재 기업이었던 두산이 한국중공업을 인수하고도 노조와의 갈등이 불거지지 않는 것은 합리적 경영과 투명성에 따른 리더십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 그는 또 통신기기 전문업체인 팬택도 인상적인 기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겨우 40대 초인 팬택의 창업자 박병엽씨는 연간 외형 7,000억원의 결코 작지 않은 기업의 실질적 오너이면서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경영자들을 외부에서 과감히 영입, 경영을 넘겼는데 정말 똑똑한 사람(smart guy)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퇴진 뒷얘기는 함구

그의 사퇴이유를 알아내려던 노력은 실패였다. 제일은행에서 자신이 할 일이 더는 없기 때문이라는 게 전부였다. 몇 마디 더물었더니 “포커 판에서 돈을 따는 방법이 뭔지 아느냐? 돈을 땄을 때 일어서는 것”이라거나“사람은 황혼이 가까워지면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연봉 30억원에 몇 십억원이 될지도 모르는 스톡 옵션도 포기해야 한다는데, 물러나면서 무슨 돈을 받기라도 했다는 말이냐”고 말꼬리를 붙잡아보았다.

연봉이나 스톡옵션을 버리는 대신 다른 무슨 큰 돈을 받기로 한 이면계약이 있지않느냐 거였는데“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에게서 만족할 만한 퇴임이유를 캐내지 못한 건 아쉽기는 하지만 그와의 대화에서 직업상의 비밀이나, 회사에 불리할 수 있는말은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직업정신의 한 단면을 읽어낼 수는 있었다. 하도 입이 무거워 이면계약이 있다면 회사에 불리한 말을 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생활신조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말자”는 것이다. 쓸 데 없는 데 노력을 낭비하느니 잘 할 수 있는 것에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자는 뜻으로 누구나 배울만한 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밝고 낙관적인 모습인데, 왜 그만 두었느냐는 질문을 이리저리 웃으며 피해나간 것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말자는 생각의 반영인 것 같았다.

지난해 3월 갓 부임한 그를 만난 후 썼던 인터뷰기사에서 그를 ‘IMF체제의 또 다른 상징’이라고표현했던 게 생각난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이 서구자본과 서구식 경영으로 대표되는 IMF체제를 불러왔으니 부실덩어리 제일은행을 인수한 미국자본에 의해 은행장으로 선임된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떠나는 마당에 내린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은 부임하기 전의 그것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에 대한 거부, 규제, 간섭, 후진적인 정치 등. 그는 이달 말 고향인 하와이로 돌아가새집을 지을 생각이다. 그 후에는 금융업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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