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년 베르사이유. 한때 루이 14세의 사랑을 받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궁정음악가 륄리(보리스 테랄)의 ‘테 데움’이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지휘봉으로 바닥을 미친 듯이 격렬하게 내리찍던 륄리는 자신의 발을 찍어버린다. “난댄서”라며 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거부하며 죽음에 다가선다.
1653년. 15세의 루이 14세가 무대에 오른다. 륄리는 루이14세에게 태양모양의 장식이 달린 새 구두와 루이 14세가 춤을 출 음악 ‘밤의 발레’를 바친다.
무대 밑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루이 14세는 ‘떠오르는 태양’이다. 프롱드파 반란 귀족의 후손도 발레에 동참시킨 그는 중심의 위치를 지키며 춤을 춘다.
재상 마자랭의 죽음 이후 친정을 선언한, 청년 루이 14세(브누아 마지멜). 그는 륄리와 몰리에르의 작품을 아꼈다.
1664년 초연한 ‘타르튀프’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귀족과 성직자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왕좌가 아직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루이 14세는 ‘타르튀프’를 강력하게 지지하지만, 모후 안느에 의해 상연이 금지되고 만다.
온몸에 황금칠을 한 루이 14세가 나타난다. 기다리던 륄리는 연주를 시작한다. ‘훌륭한 연인들’(1970년)이다.
태양의 신 ‘아폴론’으로서, 모후와 귀족들 앞에서 춤을 추는 루이 14세는 ‘태양왕’ 그 자체이다. 이제 루이 14세는 발레를 출 필요가 없다. 륄리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륄리는 오페라 처녀작 ‘카드뮈스와 에르미온’(1973년)을 발표하지만, 루이 14세는 철저히 외면한다.
‘왕의 춤’(Le Roi Danse)은 절대권력을 향한 욕망을 발레에 실었던 루이 14세의 역사와 바로크음악을 엮은 작품.
감독 제라르코르비오는 ‘가면 속의 아리아’ ‘파리넬리’ 에 이어 또다시 음악과 영화의 접목을 시도했다.
다섯 살의 나이로 왕좌에 오른 루이 14세. 섭정 모후와 재상 마자랭이 그의 통치권력을 대신하는 동안 그가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곤 발레와 음악뿐이었다.
루이 14세의 홀로서기는 그의 발레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절대권력을 장악하며 ‘태양왕’으로서 이미지를 쌓는 데 발레를 이용했고, 륄리는 루이14세가 원하는대로 그 도구를 갈고 닦아주었다.
‘짐은 국가’라고 천명하던 절대군주 루이 14세 시대가 배경이다 보니, 분위기는 웅장하다.
동성애 등 당시 궁정의 풍속도와 몰리에르의 희곡 등 궁정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로 올 칸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브누아 마지멜이 추는 왕의 춤 또한 웅장하다.
‘왕의 춤’에서 감독 코르비오는 륄리를 되살려냈다. 음악감독 라인하르트 괴벨은 자신이 이끄는 원전음악단체 무지카 안티쿠아 쾰른과 함께 출판본 없이 손으로 쓴 악보만 남아있는 륄리의 작품을 복원했다.
괴벨은 10월 개막한 서울오페라축제에서 국내에 최초로 바로크오페라 ‘미리바이스’를 소개하기도 했다. 10일 개봉.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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