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로 이민간 친지가 오랜만에 경주를 다녀와서 쓴소리를 했다."여고 시절 수학여행 추억이 그리워서 경주에 갔어요. 불국사와 석굴암은 지금도 참 좋아요. 대릉원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있었지요. 하지만 경주는 이젠 예전의 경주가 아녜요. 왜 그렇게 변했지요? 누가 고층 아파트를 그렇게 흉물처럼 지었지요. 세계적인 망신이에요."
100년도 안된 유적을 다듬어 달러를 벌어들이는 관광지를 보아오던 눈으로 우리 옛도시가 무참히 파괴되는 현장을 보고 흥분한 듯했다.
문화계에서 경주 등지의 자연환경 훼손과 문화재 파괴행위를 지적하며 걱정한 것은 오래된 일이다. 경주시민도 문화재 보존 사업으로 인해 개발이 막히고 생활이 어려워진 까닭에 적지 않은 불만을 쏟아냈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이제 국회의원들이 문화계의 오랜 과제인 고도(古都)보존을 위한 법 제정에 나섰다고 한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곧 문광위에 제출될 '고도보존정비특별법(한나라당 김일윤의원 발의)'은 경주 경실련 관계자들도 검토를 하였는데, 5일 현재 155명(한나라당 136, 민주당 15, 자민련 4)의 의원이 서명해서 국회 본회의 통과도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면 경주 부여 공주 익산의 지역주민 100여만명이 한 세대 이상 바래온 숙원사업의 해결 단서가 열리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적용해온 문화재보호법은 문제가 많았다.
주로 유적지와 문화재를 하나하나 보호하는 것만 규정해서 주변지역을 포함하는 환경 보존은 불가능하였다.
이를테면 궁궐과 사찰은 보호할 수 있었지만 그 앞을 막는 고층건물의 신축과 같은 환경 훼손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경주 등 옛도시를 신도시와 함께 발전시키면서 역사 문화환경을 보존 정비하려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법안이 필요하였다.
왜 이런 법안이 그 동안 나오지 못했는가? 정치가들이 옛도시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고, 잘 안다고 해도 보존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국 예산 확보가 어려워서 나온 문제이기도 했다. 가난한 나라살림으로 인해 막대한 예산을 여기에 쪼개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옛도시 주민들에겐 금지하는 것만 있었고 권리는 없었다. 그래서 갖가지 사연들을 안고 살아왔다.
자기집을 보수하다가 범법자가 되기도 했고, 자기땅에 집을 짓다가 문화재가 나오면 중단하고 비용을 모두 부담해서 발굴을 해야 했다. 개인에게 주는 피해는 전혀 보상하지 않았다.
이번 특별법에는 '국가가 보존 정비사업에 소요되는 비용 전액을 부담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다만 지방자치단체 고유사업일 경우 해당 자치단체가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법제정 의도를 따르면 주민들의 불만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 아무리 좋아도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 선언적 의미밖에 남지 않게 된다.
따라서 시행령을 만들면서 기금법을 따로 제정하거나 문화재 보호기금을 적극 확보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법안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5000억원에서 1조원 규모의 기금이 있어야 할 거예요. 이런 돈이 쉽게 나올 수 있을까요. 역대 정부의 문화정책을 보면 반신반의하게 되네요. 하지만 시작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한편 이 특별법은 운영주체를 격상시켜서 고도보존정비위원회의 위원장을 총리가 맡게 하였다.
부위원장은 문화관광부장관과 건설교통부장관이 당연직으로 맡고, 관계전문가들을 참여시켜서 위원회를 구성한다.
문화관련 제도로는 드문 위상이지만 파급효과와 규모로 보아 적절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 법안은 너무 늦었다. 경주 부여등 옛도시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고, 지역주민의 아우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와서야 정치권에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제대로만 한다면 문화계는 정치권의 관심을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선진국이 보유한 옛도시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이제부터 가꿔가야 한다.
우리가 가진 문화유산과 문화저력은 미래의 문화사회를 열어갈 원동력이 될 것이다.
최성자 논설위원
sj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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