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겁습니다.”제3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에 작가 오수연(37)씨는 “커다란 힘이 되지만 앞으로 더욱 잘 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런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류나 문단외적 상업성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작가들을 북돋아 온 한국일보문학상이 든든한 격려와 함께 아픈 채찍질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상작 ‘땅 위의 영광’은 원고지 475매 분량의 중편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은 그의 고민이 녹아든 것이다. 작가는 어디까지가 ‘나’의 경계인지, ‘남’의 경계는 어디서 부터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작품을 썼다고 했다.
하늘에 영광이있고 땅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영광’과 ‘평화’라는 숭고한 단어가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경계로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 있어야 할 영광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남과 나의 경계를 가르는 행위의 끝은 ‘살해’일 것이다.
나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죽여도 된다. 죽여서 먹어버리면 내 것이 된다…
작가는 음식이 살해 행위와 같다는 데 주목한다. 오씨는 ‘땅 위의 영광’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을 파고들면서, ‘남’과 ‘나’의 경계를 찾고 있다.
이 소설은 인도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한국인 유학생 ‘나’의 이야기다.
어린 하녀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 해 쩔쩔매는 나는 인도인에게 ‘하인도 못 써 본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비춰진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아랫사람과 씨름하느라 지쳐가던 여자는 어느날 ‘다모’를 찾아나선다. 다모는 내가 막 인도에 도착했을 때 학교 등록을 도와줬던 일본 유학생이다.
그때 나는 도무지 먹지를 못 한다는 다모의 연인얘기를 들었다. 다모를 찾아다니던 나는 “굶어 죽어가는 세상 사람들을 생각하면 음식을 목으로 넘길 수 없다”는 다모의 여자 친구와 조우한다.
그 여자는 흉측한 살무더기였다. 비만한 여자는 다모가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하녀 때문에 고생하면서, 아이들이 처참하게 죽어서 잡아 먹힌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면서 시간은 흘러간다. 다모의 여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는 자신과 다모가 너무나 비슷해서 미워하면서도 사랑했기 때문에 함께 죽으려 했다고 고백한다.
다모는 죽었지만 여자는 살아 남았다. 며칠 뒤 하녀는 내게 “뚱뚱한 여자 친구가 다모를 잡아 먹었다”는 소문을 전해준다.
하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괴물 ‘끼르티무카’와 비슷한 얼굴을 지어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끼르티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먹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육중한 여자, 아이를 잡아 먹는 부모, 자기 몸통까지도 뜯어먹은 ‘영광의 얼굴’.
이 끔찍한 굶주림이 왜 영광스러운 것일까. “‘영광의 얼굴’은 분노로 포효하다가, 스스로 피식자가 되어 열광적으로 먹혔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한다.
먹는 행위 속에서 남과 나의 경계를 찾아 헤매던 작가는 어느덧 ‘죄 많은 성인’으로 성장했음을 깨닫는다.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남의 살로 키워져서 남을 죽여 제 배를 채우고, 남의 새끼를 죽여 제 새끼를 키우는 다 자란 수컷 혹은 암컷으로. 남을 죽이고는 미안해 하고, 미안하지만 또 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죄 많은 성인으로.”
그래서 작가는 이 작품을 ‘성장소설’이라고 부른다. “남의 살을 먹음으로써 자기 살을 늘리는 행위는 자기를 내려놓아 다시 찾는, 자아의 성장과정과 같은 게 아닐까.”
오씨는 1997년 첫 창작집‘빈 집’을 낸 뒤 인도로 떠났다. “규정된 모습으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때 작가는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 또는 ‘절대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지독하게 단단한 의식의 껍질에 갇혀 있었다.
그 껍질은 작가에게 소설을 쓰도록 몰아붙였으며, 바깥나라로 몰아냈다. 2년넘도록 ‘장기 여행자’로 인도에 머무르면서 그는 ‘땅 위의 영광’을 포함한 세 편의 작품을 썼다.
오씨는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섬세한 소설문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심사평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사람에 대해 쓰는 글이 소설이다.
문학 일반이 모두 사람에 대한 글이기는 하지만, 소설은 사람이 사람들 속에서 타자와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안팎으로 그려내고 이야기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단연사람에 대한 글을 대표한다.
사람은 어느 때, 도대체 몇 살이나 되어야, 이런 글을 뛰어나게 잘 써내는 ‘믿을만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대체로 동의하듯 소설의 재능은 다른 분야들에서의 재능과는 아주 다르다.
과학의 천재는 20대에도 출현하지만 ‘소설의 20대 천재’는 없다. 아니, 있어봤자 궁극적으로 별 소용이 없다.
“소설은 35세 이후에”라거나 “적어도 35세는 넘겨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말이 상당량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람에 대한, 그리고 사람을 위한 글이 나오자면 그만한 세월의 더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01년 제34회 한국일보문학상 심사에서 연륜이 유일한, 혹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등단 10년 안팎의 젊은 작가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작품은 지난 1년간 발표된 중ㆍ단편으로 한정한다는 것이 이번 심사의외적 테두리 전부이다.
이 한계 안에서 심사자들이 수행한 것은 후보에 오른 다수의 유능한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그의 창작 에너지에 불을 댕겨주자는 데 합의한 일뿐이다.
모든 분야에서 창조적 재능들을 지원할 줄 아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한국일보문학상은 문학 분야에서 바로 그런 북돋아주기를 위해 제정된 일종의 펠로우십 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수상작가 오수연 씨는 젊은 작가 치고는 안심할 만한 연륜을 쌓은 사람이며,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가 자신의 문학을 빛나게 할 성실한 정신과 탄탄한 기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상작 ‘땅 위의 영광’은 이 작가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고정관념에 편승하기를 거부하는 창작 태도와 치열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어떤 학문적 성취를 위해 인도(작품에 나라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로 간 한 유학생이 빈민촌 인도인의 누추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정신적 열상(裂傷)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현실의 인도는 주 인물이 머리로 추구하고자 한듯이 보이는 어떤 오래되고 빛나는 정신문명의 구원 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주 인물이 겪는 첫 상처이다. 거기서 그는 어떤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 한 사람을 만나고그에게 이끌리지만 그러나 그 유학생도 주 인물 자신처럼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해 두 세계 사이에서 휘발해버리는 실패한 구도자이다.
이 두번째 상처끝에 그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았던 인도인 천민 하녀도 한 사람의 충분한 인간이라는 발견에 도달한다.
이는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온 일종의 득도와도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과 그 타자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세 번째 열상을 경험한다.
작품‘땅 위의 영광’은 우리 소설이 좀체 다루지 않는 소재와 주제를 깊게 파고 듦으로써 우리 문학의 지평을 한 차례 크게 넓혀주고 있다.
심사위원= 최일남김윤식 도정일
■심사경위
제34회 한국일보문학상은 2000년 10월부터 2001년 9월까지 국내 15개 월간ㆍ계간 문예지에 발표된 작가들의 중ㆍ단편소설 298편을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심사위원들은 이외에도 단행본으로 발표된 창작집에 수록된 작품 및 장편소설도 개별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예심위원으로 위촉된 황종연(동국대 교수) 방민호(문학평론가) 김미현(이화여대 대우교수)씨는 10월 23일 한국일보사에서 열린 예심에서 각각 10편 내외의 작품을 추천했다.
예심위원들은 이 중 중복 추천된 작품들을 우선 통과시키고 나머지 작품 중에서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10편을 본심에 올릴 추천작으로 선정했다.
예심 통과된 10편은 강영숙 ‘밤의 수영장’, 김영하 ‘크리스마스 캐럴’, 배수아 ‘우이동’, 오수연 ‘땅위의 영광’, 윤성희 ‘계단’, 이승우 ‘검은나무’, 이응준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이평재 ‘마녀물고기’, 천운영 ‘눈보라콘’, 한창훈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이상 가나다순)이었다.
본심은 10월 31일 한국일보사 13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심사위원 최일남(소설가) 김윤식(명지대 석좌교수) 도정일(경희대 교수)씨가 10편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토의한 결과, 윤성희씨의 ‘계단’과 오수연씨의 ‘땅 위의 영광’이 최종 수상 후보로 남았다.
심사위원들은 두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오랜 토론을 거쳐 오수연씨의 ‘땅 위의 영광’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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