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산고였다. 작년 9월부터 꼬박 1년에 걸친 생각. 그리고 한 달 반동안 그것을 풀어냈다. "소설을 쓸 때도 펜을 들어야만 실마리가 풀리는 사람도 있지만 난 머리 속에서 숙성이 되어야만 나온다."이창동(48) 감독에게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 이은 세 번째 영화'오아시스'의 이야기는 유난히 힘들었다.
시나리오를 막 탈고한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그 고민과 불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러브 스토리' 라고 했다. 사랑 이야기라? 삶과 현실에서 한치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의 영화세계, '박하사탕'의 그 끔찍한 상처 드러내기를 생각하면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아니면 우리가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것이 아니거나.
'오아시스'는 그의 말대로 분명 러브 스토리이다. 강간미수 등 전과 3범에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내고 교도소에 갔다 온 사내.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사고로 죽은 사람의 집에 갔다가 중증뇌성마비자로 추악한 외모를 가진 여자를 만난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내와 그런 사내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가는 여자. 모든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한 두 사람의 간절한 사랑을 통해 이창동 감독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작년 칸영화제에 갔을 때, 거리에 나붙은 수많은 영화 포스터를 보고 그는 "모두 판타지를 팔려고 하는구나. 영화가 판타지라면, '박하사탕'은 만나기 싫어할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원하는 판타지를 보여주기는 싫었다.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말 삶에서 판타지는 뭘까. '오아시스'는 그 질문에 대한 감독 나름대로의 대답이다.
'오아시스'는 이제는 낡고 때묻어 그 의미조차 느끼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환상의 세계이다.
- '오아시스'에서 판타지는 무엇인가. 그것이 다른 영화와 뭐가 다른가.
“사랑이다. 사랑 자체가 판타지를 찾고자 하는 행위이다. 누구나 사랑할때는 판타지를 꿈꾼다. 그리고 현실과의 거리 때문에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영화 속의 판타지를 통해 내게 없는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싫다. 그래서 보기도 싫어하는 사람들의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관객이 그것을 외면할 수도 있는데.
"기존의 판타지에 기대하면 그럴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자기와 다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내가 믿지 않은 것이 세 가지 있었다. 한국의 독자와 관객과 유권자. '박하사탕'이 그것을 깨주었다. 물론 그런 행운이 아무 때,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내 영화가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은 주었다. 물론 수 백만 명은 아니다. 그것은 소통이 아니다. 소통은 주고 받기이다. 추하고 남루하고 싫어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보려 한다. 그것이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의 시선을 변화시키고 싶다." -좀 더 쉽고, 오락적인 영화도 할 수 있을 텐데.
“흥행 부담, 감독으로서의 생존을 위해서도 보다 많은 관객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관객이 원하는 것을 주기는 싫다. 체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 혼자 자위행위하는 예술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소설로 많이해 봤다."
-2년에 한 편씩 해서 생활할 수 있나
“영화 '박하사탕' 연출료로 2년 생활하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소설가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아왔다. 2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생각하고 시나리오 쓰고, 찍고 하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매끈하게 누가 찍어도 비슷한 작품을 하는 장인형 감독이 아닌 작가형 감독이니 처음부터 자기 것을 자기방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역시 칸 영화제 출품을 염두에 두고 있나.
"남자 주연은 설경구가 맡기로 했지만 아직 여배우는 결정되지 않았다. 12월에 촬영을 시작해도 빨라야 4월에 끝난다. 도저히 불가능하다. 해외를 바라보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 식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내 하고 싶은 대로 만들어 우리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
최근 한국 영화의 지나친 오락화와 흥행에 대한 생각을 물어 보았다. 대답이 최근 단편적인 시각을 깨우쳐 준다
"영화가 오락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양성이 파괴되는것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악영향'을 쉽게 얘기할 수 없다. 한국 영화 산업이 살아 있다는 것이고, 작가영화도 그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시장요구와 상관없이 만들어지는 대만이나 중국과 다르다. 때문에 한국의 작가영화는 나쁘게 보면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 어중간한 모습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끝없이 예술과 대중을 연결시키려 노력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영화의 힘이다."
'오아시스'는 이번 부산영화제 부산프로모션플랜(PPP)에 나간다. 해외투자 유치보다는 이창동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알린다는 의미가 크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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